나. 제2단계
한국문제 해결의 주 무대로 여겨왔던 유엔에서의 세력판도가 전술한 바와 같이 1960년 후반~ 1970년 초에 걸쳐서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되었으니 아프리카 등 전식민지의 독립으로 인한 신생국가의 유엔 가입이 유엔 회원국수를 본래의 51개국에서 130여 개국으로 증가시키고 그들의 투표성향이 미 ‧ 소 양진영 간에 중립 또는 반미 ‧ 친소로 변하여 간 것이다.
이와 같이 비동맹세력이 비대하여지고 유엔에서의 하나의 블록으로 반미적인 성향의 투표를 하게 되자 남한에 유리한 서방측 제안의 계속 채택이 불확실하게 되고 유엔총회에서의 한국문제 연례 상정이 그 실효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큰 외교적 부담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국제정세의 변화 즉 유엔의 세력판도의 변동, 미-중공 수교 교섭의 급진전(닉슨 대통령 중공방문, 상해 communique 발표) 등은 실효성 없고 점차 부담이 되어가는 유엔을 통한 통일 노력이 무익함을 절감하게 하고 북괴의 법적 인정은 몰라도 북괴라는 실력집단이 휴전선 북쪽에 존재하며 이를 상대로 대화하고 교섭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궁극적으로 민족화해를 통한 통일의 성취를 모색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1년 적십자회담 제의, 1972년 7 ‧ 4공동성명 합의 등으로 남북한 간에는 직접 대화가 진행되었으며 북괴와 대화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유일 합법성 운운은 실제적으로 계속 주장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아프리카 신생 제국 특히 중립성이 농후한 국가(카메룬)가 대남한 단독수교로부터 이탈하여 북괴와의 국교소립을 결정(1972년 3월)하게 됨에 따라 남한은 서독의 소위 할슈타인 닥트린(서독의 독일민족 유일대표권을 주장하는 Hallstein Doctrine)과 유사하게 국제관계에 있어서 배타적인 유일합법성 주장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의 여파로 1973년 5월 WHO총회에서 북괴의 가입이 가결되자 유엔전문기구에 대한 북괴의 진출이 개시되었고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남한의 노력이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남북대화의 개시는 남북한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을 회복하려는 우리 민족의 노력에 새로운 시기를 연 점에 있어서 획기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으나, 남북 7 ‧ 4공동성명과 이에 따른 조절위원회의 조직운영이 그 후 어떻게 무실화하였는가는 잘 알려진 일이므로 여기에 상론하지 아니한다.
생각건대 북괴로서는 남북공동성명 중 외세의 개입을 배제한다는 문구에 역점을 두고 이로써 미군철수를 촉진하고 또한 남북한대화를 통하여 남한사회 내부를 더 효과적으로 교란할 수 있는 방편과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한은 유엔과 주한유엔군은 외세가 아니라는 해석을 함으로써 북괴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고 또한 남한의 경제발전과 그 후 정치정세 발전으로 보아 남북조절위의 활동계속이 북괴 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한 것이 사료된다.
요컨대 남한은 종전의 유엔 감시 하 자유민주총선에서 일단 후퇴하고 유엔총회 결의의 실천을 통한 통일성취 노력을 포기하였으며 (UNCURK 해체, 한국문제 연례상정 지양) 유엔의 한국문제 관련은 사실상 유엔군사령부의 명목상 존속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 대신 북한을 대등한 대화상대로 사실상 인정하고 인도 ‧ 문화 ‧ 경제 ‧ 정치 등 각 방면의 교류를 대화를 통하여 추진하고 이러한 교류의 결과로 긴장완화, 상호신뢰조성, 평화공존, 민족화합, 자유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을 점진적으로 실현하겠다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외교 면에 있어서도 1973년 6 ‧ 23외교선언을 발표하여 우리 외교의 기본방침과 북한 및 공산권에 대한 신외교정책을 천명하였다.
남한이 유일합법성 주장을 사실상 지양하고 북괴를 대화의 상대로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자 북괴는 이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북괴야말로 민족의 자주독립을 구현한 정통정부라는 북괴판 유일합법성을 주장하고 남한은 미군의 점령지역이며 미국의 식민지에 불과하고 한반도 문제의 실질적 해결은 북괴와 남한이 아닌 미국이 교섭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는 괴상한 일이 발생하였다.
북괴는 이러한 궤변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미군의 주둔은 물론 남한이 휴전협정의 조인 당사자가 아니고 미국장군이 서명자임을 지적하며 또한 작전지휘권이 한 ‧ 미간 협정에 의하여 유엔군사령부(한 ‧ 미 연합사령관 겸임)이 행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왜곡, 군통솔권 자체가 한국정부에 없는 것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연방제에 의한 통일성취론은 전술한 바와 같이 본래 남한의 자유민주선거에 의한 평화통일 달성이라는 공세전략에 대하여 이를 거부하고 북괴의 별도존립(seperate existence)을 수호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이 농후한 전략이었으나 남한이 공세에서 후퇴하여 현실적인 대화정책으로 전환하자 북괴는 남한적화통일 달성을 위한 공세 전략의 측면을 대폭 강화하였다.
북괴는 미군철수를 위한 국제적 선전(비동맹회의 이용 등), 베트남 및 워터게이트 후유증(Vietnam, Watergate syndrome)에 의한 미국의 신고립주의 경향 이용 등 국제적인 공작을 가오하하는 한편 남한의 내부교란을 위하여 지도층 암살(1974년 문세광 사건, 1983년 랑군 사건) 그리고 수많은 무장간첩을 남파하여 온 것이다.
이와 동시에 국내외의 여론을 기만, 오도하고 대북괴 경계심을 이완시키기 위하여 수시 대화, 미소 전술을 병행하여 온 바, 특히 남한의 국내정치, 사회정세가 혼란을 겪고 있을 때(1979년 박대통령 피살과 이에 따른 정치적 혼란시기)에 남북총리회담을 제의하였으며 그 후 남한 또한 랑군만행 이후 국내외의 여론이 북괴를 극렬히 비난, 성토하게 되자 이 효과를 완화, 말소시키기 위하여 1984년 여름 수해구호물자 제공 제의를 함으로써 북괴의 인도주의 정신을 과시선전하고 남북대화 개최의 기틀을 삼도록 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랑군만행사건은 중공을 통한 한-미-북괴 3자회담 개최 제의와 표리를 이루는 북괴의 통일종합 전략 시행의 일환이었으며 북괴가 적화통일을 위하여 강온 ‧ 화전 양면작전을 수시 또는 동시에 수행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었다.
남한이 1981년 1월 남북한 당국의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1981년 1월 12일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연설)하였고 그 후 수차에 걸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한 바 있으나 북괴는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또한 1982년 1월에는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제시하고 동 2월 그 실현을 위한 20개항의 구체적 시범사업 추진을 제의한 바 있으나 북괴는 역시 이를 무시하였다. 이와 같이 남북한 간의 대화를 개최하려는 남한의 적극적인 노력에 대하여 북괴는 계속 거부적 태도를 보이다가 전술한 바와 같이 랑군만행에 인한 국제적 비난과 고립을 면하기 위하여 수해구호물자 제의를 하게 되고 남한이 북괴가 제의한 수해구호물자를 수락하고 이에 뒤이어 적시자회담 및 경제회담 제의를 함으로써 남북대화가 재개되었다.
또한 북괴가 제의한 국회회담 및 IOC가 알선하여 개최되고 있는 올림픽관계 회담 등이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그 귀추가 국내외의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5. 분석과 평가
분단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의 상호관계 및 통일정책을 개관하건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가. 남북한은 통일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데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하겠으나 각각 상이하고 대립된 이데올로기와 체제로 인하여 통일의 형태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 수단에 있어서 대결적이고 경쟁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 남북한은 각각 자기 측의 국력 즉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 제면을 총괄한 전체 역량을 반영하고 이에 기초한 정책과 전략을 수립,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제안을 수시로 하고 있다.
다. 전항의 국력 산정에 있어서 남북한은 각각 그를 지지하는 배후 우방세력과의 관계, 그들의 대한반도 정책 및 그들 상호 간의 관계를 고려하게 되며 이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다.
라. 남한이 통일의 궁극목표를 향한 단계적 점진론을 주장하는 데 반하여 북한은 미군철수와 더불어 연방제의 조속 실현으로 통일문제를 단발적, 전체적으로 해결하여 버리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남한은 평화공존과 평화정착의 선결을 주장하고 북한은 외군철수와 통일의 선결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매우 비현실적인 전략이며 남한적화통일을 위한 계략이 숨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