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세관 분석실장 시절 중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부산항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감시 체계를 완성한 일이다. 신축한 부산세관 옥상에 3층을 더 올려 9층에다가 중앙 망루를 설계했다. 중앙 망루에 야간투시경과 SSB(single side band) 방식의 최신 무선통신 시설을 들여와 설치해 놓았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장비들이었다.
분석실장 시절에 내가 한 일들 중에는 분석실장의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들도 많았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회장님은 왜 당시의 직급에서 안 해도 될 일들을 벌여서 사서 고생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시간은 흘러가고 역사는 지나가 버린다. 그러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도 놓쳐 버린다. 때문에 나는 내가 할 일을 직접 찾아냈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내 직급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내 눈에 보이는 일이면 뭐든지 그 대상이 되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1969년 3월 1일자로 부산에서의 마지막 임기를 마치고 재무부 감정과장으로 이동되었다. 1년 반 만에 다시 서울로 근무지를 옮기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나는 관세청의 태동을 맞이하게 되는데, 공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 개인으로서는 매우 가슴 아픈 사건을 겪게 되었다.
1968년 3월 3일에 국세청이 창립되었다. 이듬해인 1969년 3월 3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세청 창립 기념식장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기념식장으로 가는 도중 박 대통령은 당시 경제수석 정소영(鄭韶永) 씨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국세청은 저렇게 훌륭히 자기 일을 하는데 세관은 뭐 하느냐?" 다분히 힐책이 깃들인 어투였다. "세관도 정식으로 관세청을 발족시켜 체계를 잡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경제수석은 이렇게 말했다. "관세청을 발족시키기 전에 내가 할 일이 있어." 그런 말이 오고 간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당시 재무부 장관 남덕우(南悳祐) 씨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앞에 섰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박대통령은 책상 위에 놓인 보따리를 밀면서 말했다.
"그동안 나에게 들어온 세관 비리에 대한 투서요. 그리고 이것은 투서와 관련해 예비 조사를 해놓은 것이오. 이것으로 먼저 청소부터 하시오." "알겠습니다." 물러나오면서 남덕우 씨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 세관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리의 온상이었기 때문이다. 남덕우 장관은 곧바로 그 살생부(殺生簿)를 재무부 기획관리 실장이었던 최각규(崔珏圭) 씨에게 넘겼다. 최각규씨는 서울문리대 정치과 출신으로, 1957년에 고시 7회 동기인 서울법대 출신 김용환(金龍煥) 씨와 같이 재무부로 왔다. 그러다가 경제기획원이 생기면서 재무부 예산국이 그쪽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경제기획원으로 갔다가, 한비사건으로 김정렴(金正濂) 장관이 그만둘 당시인 1966년에 재무부 세관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70년에는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살생부를 받고는 무척 난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영으로 떨어진 사안이었던 만큼 시급히 처리해야만 했다. 이 일을 착수하기 위해, 그 업무를 담당할 인선 작업이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당시 국제과장이었던 이규성(李揆成) 씨는 서울세관 감사를, 지도과장이었던 성기덕(成耆德·작고) 씨는 인천세관감사를, 감정과장이었던 나는 부산세관 감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감사반원으로는 세관 근무가 오래되고 청빈한 관료들 중에서 50명을 선발했다. 이 모든 것이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대대적인 숙정(肅正)을 위한 준비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꼭 했어야 했는가 하는 생각과, 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감회로 마음이 항상 착잡하다.
드디어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때 부산으로 함께 간 감사반원은 반장인 나를 포함하여 20명이었다. 야간열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들은 많은 토의를 했다. 정말 착잡한 심정들이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그냥 있을 수는 없다는 의견이 대다수였고,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부산세관은 우리 나라 화물 물동량의 75%를 차지하고 있었고, 세금 액수로는 8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만큼 다른 곳보다 더 많은 비리 관련 투서 대상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희생자들에게 많은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들 중에는 자기 딴에는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엉뚱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원래 살생부에는 없었는데 감사 과정에서 대상에 포함된 사람도 있었다.
감사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본선(本船)으로부터 선원을 육지로 운반하는 배를 '쌍판'이라고 한다. 쌍판에는 세관원 한 사람이 탑승해 본선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물건들을 현장에서 조사한다. 그런데 감사 기간 중에 한 세관원이 본선에서 물건을 가지고 내리는 사람을 고의로 봐주는 일이 일어났다. 그 현장을 덮친 감사반원은 남현우(南賢祐)라는 사람이었는데, 해군 유디티(UDT) 출신으로, 원칙을 지키는 데에는 매서운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사람에게 걸려든 사람은 K라는 감시과 간부였는데,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K는 정말 색시 같은 사람으로, 나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칙은 원칙이었다. 나중에 그는 우리들의 숙소까지 와서, “살려주시오. 내 직장을 만들어 줄 때까지는 안 움직이겠소” 하면서 떼를 쓰기도 했는데, 감사반원으로서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