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택(林元澤) 형의 편지
-1953년 3월 16일, 임원택 형이 마산요양원에서 대구에 있는 공군본부로 보낸 편지-
정민 형(正民 兄),
전소위(全少尉)를 통해서 보내주신 혜서(惠書) 반가이 배독(拜讀)하였습니다.
형(兄)의 여전(如前)하신 ‘인생철학(人生哲學)’도 대단히 흥(興)겹게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것에 불구(不拘)하고 자연(自然)―또는 자연(自然)에 준(準)하는 것―은 제대로 움직여 자기 고유(固有)의 법칙(法則)을 관철(貫徹)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설명(說明)한다는 것, 또는 그것을 안다는 것, 그것은 과연 필요(必要)한 것인가? 필요(必要)하다 치고 얼마만한 가치(價値)가 있을까? 이런 것들에 대(對)해서 정민 형(正民 兄)은 대체로 부정적(否定的)― 이 말이 과(過)하다면 초연적(超然的)―태도(態度)를 취(取)하십니다.
그러나 제(弟)는 그 점(點)에서는 아마 형(兄)과 약간(若干) 태도(態度)를 달리 하는 것 같습니다. 제(弟)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식(認識)할 필요(必要)가 있다. 왜? ‘사색(思索)’ 자체(自體)의 아편적(阿片的) 도취감(陶醉感)에 매력(魅力)을 느껴서보다 올바른 행동(行動)의 지침(指針)을 얻기 위하여.―
그런데 제(弟)의 경우(境遇)에 있어서는 이것이 즉 인식(認識)과 행동(行動)의 통일(統一)이 전자(前者)의 비중(比重)의 과중(過重)으로써 잘 행(行)해지고 있지 않은 것이 큰 결점(欠點)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제(弟)의 이상(理想)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제(弟)의 값싼 인생철학(人生哲學)입니다.
그런데 제(弟)의 생각이 어떻든간에, 오늘 아침에 요양소(療養所) 정원(庭園)을 산보(散步)해 보니 나뭇가지마다 꽃봉오리가 솟아올라오고 있는 데는 ―당연(當然)한 현상(現象)이지만―대단히 기쁨의 마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겨울이란 시련(試鍊)의 시기(時期)를 극복(克服)한 뒤에 개화결실(開花結實)하는 자연적(自然的) 생명(生命)의 힘에는 어떤 교훈적(敎訓的)인 것조차 느낄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남국(南國)의 해항(海港) 마산(馬山)에는 지금 바야흐로 봄 기(氣)가 침침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자연(自然)은 아름답고 살기에 마련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볼 적에는 인간사회(人間社會)가 어떻든 삶에 대(對)한 의욕(意慾)을 한층 더 치열히 느끼게 됩니다.
형(兄)이여! 제(弟)는 여전히 앞으로도 살기 위한 투쟁(鬪爭)을 계속(繼續)할 것입니다. With patience and perseverance!
그러면 형(兄)의 소식(消息)을 기다리면서 오늘은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삼월 십육일(三月 十六日)
제(弟) 두남(杜南)
추신(追伸):별봉(別封) 편지(便紙)를 형(兄)께서 직접(直接) 김중장(金中將)에게 전(傳)하여 주십시오.
유진오(兪鎭午) 선생님의 편지
-1953년 5월 5일 뉴욕에서 보내신 편지-
윤석헌 대위(尹錫憲 大尉),
지난 사월(四月) 십오일부(十五日附) 혜서(惠書)는 콜럼버스(오하이오주:州)로 전송(轉送)되어 반갑게 받아 읽었으나 답장(答狀)이 늦어져서 미안만만(未安萬萬)이외다. 나는 사월(四月) 일일(一日)날 여행(旅行)을 나서서 각지(各地) 대학(大學)을 순방중(巡訪中)에 있어서 그 동안 여정(旅程)이 총총하여 그리 된 것이니 관서(寬恕)하십시오.
학문(學問)에 대(對)한 귀군(貴君)의 열정(熱情)은 전(前)부터 이미 나도 지실(知悉)하는 바이나 사계(斯界)의 소위 선배(所謂 先輩)로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자탄(自歎)하는 바이며 비록 민족(民族)의 수난기(受難期)라고는 할지라도 학문적(學問的)으로 전도(前途)가 있는 귀군(貴君)이 학문(學問)에 종사(從事)할 시간(時間)이 없이 지내게 되는 형편(形便)을 또한 민망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이오. 바라건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創造)하는 각오(覺悟)를 관철(貫徹)하도록 하십시오. 학문(學問)의 길은 눈에 보이는 보수(報酬)가 있기는 어려운 길이나 정신(精神)의 안정(安定)은 비교적(比較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닌가 하니 역시(亦是) 무용(無用)의 길은 아닌가 하오.
십수개(十數個) 미국(美國)의 대학(大學)을 순찰(巡察)하고 얻은 우리나라의 대학(大學)과 학계(學界)에 대(對)한 감상(感想)은 희비 교착(喜悲 交錯)된 것이오. 하버드, 미시간 등(等) 고봉(高峰)을 바라보면 낙망(落望)도 되나 그 몇 개 이외(以外)의 미국 학원(美國 學園)을 보면 도리어 용기(勇氣)를 얻게 되는 것이 사실(事實)이오. 모든 악조건(惡條件) 밑에서도 자기자신(自己自身)이 노력(努力)만 계속(繼續)한다면 어느 정도(程度)의 업적(業績)은 쌓을 수 있는 것이라는 자신(自信)도 생기오.
공군(空軍)에서는 미국인(美國人)과 접촉(接觸)할 기회(機會)는 많을 것이니 영어 회화력 향상(英語 會話力 向上)에도 노력(努力)하시오(나는 이곳에 온 지 팔개월(八個月)에 영어(英語)는 늘지 않고 <브로큰>을 뻔뻔스레 지껄이는 배짱만 늘었을 뿐).
빠르면 칠월 하순(七月 下旬) 늦으면 구월 중순(九月 中旬)에는 귀국(歸國)할 예정이오. 안녕(安寧)히 계시오.
나는 이달 중순경(中旬頃) 표기(表記)의 주소(住所)로 돌아가서 약(約) 이개월(二個月) 하버드 대학에 더 머물러 있을 예정이오.
임원택 / 1922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71년 서울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성균관대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1989년까지 재직했다. 1986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됐으며 2006년 사망했다.
유진오 / 1906년 5월 13일 서울 종로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등을 지냈으며, 해방 이후에는 헌법기초위원, 법제처장, 한일회담 수석대표, 고려대학교 총장, 신민당 총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 12월부터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7년 8월 사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