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실에는 차관을 지낸 최문경(崔文卿) 대사와 이창희 공사가 먼저 와 있었다. 오래간만에 한가한 세월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세월은 흘러가기 마련으로 대기실 생활도 어언 10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불원 대기실을 다른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어 대기실 인원을 소개할 것이라고 하였다. 최문경 대사는 처음에 외교연구원장으로 내정되었으나 본인이 이를 거절하고 뉴욕에 살고 있는 아들과 노후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뉴욕 총영사 임명을 원하여 그리하기로 결정되었다 한다. 이창희 공사는 주 인도네시아 총영사관이 개설되면 총영사로 임명될 예정이라고 하였다.
나는 멍청하니 눈만 꿈벅거리며 앉아 있었는데 하루는 신기흠(申基欽) 총무과장이 와서 내가 외교연구원장으로 고려되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때 외교연구원은 원장이 1년 이상이나 공석으로 있었고, 아시아재단의 재정원조로 장충동에 지은 외교연구원 건물은 유엔 한국위원단(UNCURK)에게 물려주고 길 건너 공무원훈련원 2층을 빌려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註, 외무부 직원 중 보직이 없는 자들을 배속시켜 사실상 대기실 역할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외교연구원의 본래의 기능은 외교관의 자질향상을 위한 교육 임무와 외교정책의 질적 발전을 위한 연구 임무를 겸하여 일상적인 외무행정에 머물기 쉬운 외무본부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발전, 향상시키는 중요한 기관이어야 하는 것인데 실제는 휴지통 역할을 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나는 이동원 장관을 만나보기로 결심하고 면담을 신청하였다. 며칠 후, 장관실에서 연락이 와서 이 장관을 만났다. 나는 이 장관에게, 장관이 나를 외교연구원장으로 임명할 것을 고려중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외교연구원의 현황이 매우 침체되어 있으며 나도 대기생활 1년에 시기가 좋은 편이 못된다고 말하고, 이제 대사가 보임되던 외교연구원장 자리에 대기 공사를 앉혀 놓으면 누구나 외교연구원을 더욱 격하하고 대기실화 하는 조치로 볼 터이니 좋은 인사 조치가 아니라고 솔직히 말하였다.
이 장관은 인내성과 호기심 섞인 얼굴로 나의 긴 설명을 듣고 있더니, 그러면 대사로 진급시켜 달라는 말이냐고 반문하였다. 나는 “아, 그렇게 하면 외교연구원을 회생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저로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장관은 의외로 선선하게 “그럽시다. 대사로 승진시켜 줄 테니 열심히 일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 외교연구원의 본래 기능발휘를 위하여 진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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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교연구원장 취임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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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9일 대사 임명과 더불어 외교연구원장의 보임을 받고 장충단에 있는 공무원훈련원 2층 사무실로 갔다. 직원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외교연구원이 쓸데없는 잉여 외교관의 휴게실이나 대기실이 아니라 본래의 중요한 임무, 즉 교육과 연구의 일터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심기일전(心機一轉) 합심매진(合心邁進)하자고 선동하였다.
전 직원과 연구원의 정시 출퇴근과 바둑, 장기 등 일체의 유희를 엄금하였다. 그 해 12월에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가 외무장관직을 겸임하게 되었으므로 정 장관에게 품의하여 연구원 중 고참 인원을 재외공관에 배치하도록 하고 장관의 정보비 1,500만 원을 할애받아 연구비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통일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과 항쟁하는 것이 한국 외교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외무부 내에 이 문제를 전담하여 폭넓고 깊이 있게 연구하는 부서가 없음을 감안하여 연구부에서 통일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도록 하였다. 송광정(宋光禎) 연구부장의 지휘 아래 연구원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를 모아 67년 8월 <통일문제 연구기구 설치에 관한 고찰>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당시는 국토통일원이 생기기 전으로 정부에서 이러한 종류의 연구서적을 간행한 것이 처음이라 관계요로의 이목을 끌었으며, 특히 외무부 본부에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註 : UNCURK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던 옥인동 윤덕영(尹德榮) 저택이 화재로 사용불능이 되어 새 사무실을 물색하였다. 당시 UNCURK라고 하면 한국 통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에 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 조야에 대한 발언권이 막강하였다. 시내에 적당한 독립 건물을 구하려 하였으나 쉽지가 않아 시일이 지연되던 중, 마침 외교연구원을 매우 적호한 것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그 건물은 외무부 산하기관이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UNCURK에서는 청화대에 건물 사용을 청원, 이후락 비서실장이 직접 외교연구원을 방문답사하게 되었다. 이비서실장이 가 보니 원장도 없고 사무직원들도 별로 없을뿐더러, 연구원이라는 사람들이 장기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그 길로 돌아와 이비서실장은 외교연구원 건물을 UNCURK에 주라고 외무부에 지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