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와의 통상교섭은 내가 필리핀에 부임하여 근무하는 중, 68년 2월 27일에서 3월 16일의 기간 동안 다시 싱가포르에 출장을 가서 제2차 교섭을 시도하였다. 주 말레이시아 대사관 이수우 참사관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이 연(年) 150만 달러의 싱가포르 공산품을 수입해주면 합의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싱가포르 측으로부터 들었다며 다시 가서 교섭하라고 본부에서 지시한 것이었다.
3월 1일 신 기 분 재무차관과의 면담에서 제1안으로서 먼저 120만 달러 수입을 제시하였으나 싱가포르 측이 이에 불응했으므로 최종 타협안으로 150만 달러 수입 및 아국의 대(對)싱가포르 수출이 300만 달러를 초과할 시에 초과분의 50%를 추가로 수입한다고 제의하고, 싱가포르 측에 고려할 시간을 주기 위하여 3월 3일에서 6일까지 자카르타에 다녀왔다.
이것은 싱가포르에서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심리적으로 아 측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측은 바로 이 점을 이용, 3월 12일과 13일로 예정되어 있던 면담을 무기한 연기하고 회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나는 교섭의 성공은 합의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유리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며, 불리한 합의보다는 유리한 불합의 상태가 더 낫다고(No agreement is better than a bad agreement) 말하고, 3월 16일에 마닐라로 귀임코자 한다고 본부에 보고하였다.
싱가포르와의 본건 교섭은 그 후 계속 중단 상태에 있다가 79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 개발은행 총회에 싱가포르 수석대표로 참석한 고 겐 수이 장관과 외무부차관으로 서울에 있던 내가 4월 10일 조선호텔에서 조찬을 같이 함으로써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싱가포르는 바로 전 해인 69년 12월 북한의 무역대표부를 영사관으로 승격시켜 주었었다. 내가 고 장관에게 싱가포르가 한국과 영사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싱가포르가 표방하는 중립주의에도 부합하는 일이라고 말하니, 고장관은 한국-싱가포르 간 영사 관계 수립의 필요성에 통감한다고 하며 귀국 후 외무장관과 협의하겠다고 약속하였다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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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코스 대통령이 베푼 만찬을 보도한 필리핀 신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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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한국이 자국과의 관계 개선을 갈망하고 있으니 가만히 앉아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버티고 있었으나 시일이 많이 지나도 한국이 소기의 대가를 치르고 달려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 장관 자신이 한국에 와서 한국이 경제적으로 활기에 찬 전도가 유망한 나라임을 목격하고 좁은 눈을 활짝 뜬 격이 된 모양이었다.
이 일은 결국 외교 교섭에 있어서 일방적은 조급함은 성사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값만 올리게 되며, 때가 되면 더 유리한 조건으로 성사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찾을 수 있는 실례라고 하겠다.
1967년 9월 30일자로 주 필리핀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싱가포르와의 통상 교섭 때문에 지연되어 실제로 마닐라에 부임한 것은 11월 하순으로, 그 해 11월 23일 말라까냥궁에서 마르코스(Ferdinand E. Marcos)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였다.
당시 마르코스는 아직 독재자로 변신하기 전으로 똑똑하고 영특하게 보이는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필리핀은 미국과 밀착, 특수 관계에 있는 나라로 한국문제에 대하여 시종일관 우리를 지지하여 주고 6․25전쟁 때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참전한 16개국 우방 중의 하나이다. 매년 UN 총회에 상정되는 한국문제 토의에서는 필리핀 대표가 으레 웅변을 토하여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고 공산 측의 무리한 정책을 성토하곤 하였다.
따라서 양국 간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분쟁이나 의견 차이가 없어 주재 대사로서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고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의 사과와 필리핀의 바나나를 교역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오고갈 뿐이었다. 그러므로 양국 간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국민간의 이해와 우호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필리핀의 각계각층과의 접촉을 넓히고 지방 각지를 방문하여 한국을 소개하는 데에 힘썼다.
註 1971년 12월 5일 주 싱가포르 통상대표부 개설, 1972년 7월 5일 총영사관으로 승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