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필리핀 대사로 부임할 당시 마닐라에는 아시아 개발은행(ADB)에 천병규(千炳圭) 전 재무부장관이 이사로 와 있었고 계봉혁(桂鳳赫) 박사 등 한두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등, 교민 사회는 비교적 단출하였다.
나르시소 라모스(Narciso Ramos) 외무장관은 원만한 인격의 신사로서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으며, 또 골프를 즐겨서 주말에는 가끔 골프를 같이 쳤다. 본부에서 중요한 지시가 오면 의전장에게 라모스 장관과의 골프 약속을 부탁하여 골프장에서 중요한 외교 업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나의 마닐라 주재 후반기에는 외무부장관이 로뮬로 장군(Gen. Romulo)으로 바뀌었는데, 나는 이 분과도 무간하게 지냈다. 이 분은 내가 주미대사관에 처음 근무할 때 필리핀의 주미대사를 지낸 사람으로, 당시 쉐리단 서클(Sheridan Circle)의 서쪽에 한국 대사관이 있었고 북쪽에 필리핀 대사관이 있었으며 한국과 필리핀 대사 두 분이 다 키가 작은 대신 연설을 잘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양유찬 대사는 산부인과 의사 출신이라 아기 해산에 관한 농담이 일품이었고, 로뮬로 대사는 제2차 대전 시 맥아더 장군 휘하의 홍보 담당 보좌관(계급은 준장)으로 있을 때 레이테(Leyte)섬 상륙 작전 시 맥아더 장군은 넓적다리까지 물에 잠겨 해안에 상륙하였는데 자기는 가슴까지 물에 젖어 뒤따랐다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자주 하였다. 한 번은 내가 본국 근무로 귀국하기 전, 그에게 웅변 기술을 배우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으니 서울 가지 말고 마닐라에 더 있으면 가르쳐 주겠다고 하여 웃은 적이 있다.
나르시소 라모스 외무장관의 아들이며 6․25전쟁 때 참전, 필리핀군 정찰 소대장으로 활약한 피델 라모스(Fidel Ramos) 대령이 우리 정부로부터 아무런 훈장을 받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나는 이에 대한 적절한 서훈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내가 마닐라를 떠난 후인 1970년 10월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하였다.
마닐라 외교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와는 달리 우리나라가 분단국이라는 데서 오는 이상한 차등감 같은 것 없이 당당한 위신을 지킬 수 있고 주재국민과도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동료 의식을 갖고 편하게 사귈 수 있어서 좋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 대사들과도 자연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그 중 특히 캄보디아 대사 시릭 마탁(Sirik Matak)은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내성적이고 얌전한 귀족 출신(시아누크 왕과 사촌간이라고 함)으로 리셉션(Reception) 등 외교행사 때에는 한쪽 구석에서 혼자 가만히 서 있는 일이 많았다. 나는 캄보디아가 중립국으로서 우리와 국교가 없었으므로 이와 가깝게 접촉해 보고 싶은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다가, 또 그가 영어를 잘 못하여 프랑스어로만 이야기하였으므로 우리는 곧 서로 친하게 되어 외교행사 때는 대개 그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었다.
그 후 그가 먼저 자국으로 돌아가고 나도 이어 본부로 돌아오게 되어 서로 소식이 끊겼다. 그런데 1970년 캄보디아에서 쿠데타(Coupd’Etat)가 발생하여 론놀과 시릭 마탁이 좌경 정책을 쓰던 시아누크 왕을 축축하고 우익 친미 정부를 수립하였다.
나는 곧 시릭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치혁명의 성공을 축하하고 한국-캄보디아 양국 간의 국교 수립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캄보디아 신정부의 기본 정책과도 합치하고 시기적으로도 적합하였으므로 별다른 장애 없이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필리핀 재임 시 기억에 남는 일들 중에는 채명신 파월군 사령관의 초청으로 월남에 가서 파월 국군을 위문한 일이 있다. 내가 탄 비행기가 사이공 비행장에 착륙하려 할 때 창밖으로 소방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비행기를 따라오는 모습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의장대 뒤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비행기가 정지하여 문을 열고 트랩에서 내리니 채명신 장군이 달려와서 내 손을 잡으며 하는 말이 비행기의 두 엔진 중 하나가 정지되어 비상착륙을 한 것이라 한다. 나는 중부 전선에 나가 있는 맹호부대와 백마부대를 위문, 대포도 쏘아보고 월남 전쟁의 실정을 살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