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입장이 곤란한 일이 있었다. 부임한 지 약 1년이 지났을 무렵, 하루는 마닐라의 신문에 마르코스 대통령이 불원간 자유중국을 공식 방문하는데 그 다음에 한국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는 보도가 크게 게재되었다.
즉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니, 필리핀 정부는 자유중국 정부와 마르코스 대통령의 타이베이 방문을 협의 중이었는데 대만만 방문하고 돌아오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나선 김에 한국도 방문하고 싶어서 한국 측의 초청을 유도하려고 신문지상에 슬그머니 이 생각을 흘린 모양이었다.
나는 본부에 이러한 사정을 보고하고 한국-필리핀 양국 간의 긴밀한 우호협력을 일층 강화하기 위하여는 이 일을 실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니 마르코스 대통령의 희망을 들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정부로부터는 쓰다달다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다음 해 연초 공관장회의 때 서울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을 뵈니, “마르코스 대통령이 정 오고 싶다면 아무 때고 잠깐 들러 가거나 말거나 하라고 그러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1966년 10월 24일~25일 마닐라에서 열린 월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 때 마르코스 대통령이 혼자 온갖 쇼를 다하고 또한 존슨 미국 대통령만 끔찍이 대접하고 박 대통령 등 다른 국가원수에게는 소홀히 한 데 대하여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럭저럭 큰 탈 없이 주 필리핀 근무가 2년이 되어가던 무렵, 1969년 12월 본국 소환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정부는 1969년 12월 8일자로 나를 외무차관에 임명하였다. 1974년 2월 4일 주 불란서 대사로 임명될 때까지 4년 2개월 동안 최장수 차관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위로 모시던 분이 1971년 6월까지 재임한 최규하 장관으로 이 분은 나를 차관으로 불러주신 분이고, 또 그 후임으로 오신 김용식 장관이 계속 같이 일하자고 하여 인정에 끌려 그렇게 된 점도 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어디에서나 나의 임무만 충실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약삭빠르게 자리를 옮겨 출세의 길을 적극 추구하지 못하는 내 성격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기간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큰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3선 개헌에 따른 대통령 선거와 박정희 7대 대통령 취임, 1971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제의, 1972년 7월 4일의 남북공동성명,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과 이에 이은 유신헌법 제정, 1973년 9월 8일의 김대중(金大中) 납치 사건 등, 충격적인 중대사건들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계속 발생하던 시기였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1971년 7월 1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의 불원 중공 방문 계획 발표, 71년 10월 25일 중공의 UN 가입, 72년 2월 21일~28일의 닉슨의 중공 방문과 상해공동성명 발표 등, 동북아 정세에 큰 지각변동이 있었다. 또한 1960년대에 시작된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 신생국가를 주축으로 한 비동맹 세력이 국제정치에 점차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UN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의 외교정책 및 통일전략에 중대한 시련을 가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1972년 봄, 아프리카의 카메룬(Cameroun)이 북한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당시까지 ‘한반도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UN 감시 하 자유민주선거에 의하여 수립된 유일 합법 정부이며 북한 정권은 불법 침략집단이므로, 북한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나라와는 국교를 단절한다.’라는 소위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註을 따라오던 우리 정부는 이 원칙을 계속 고수해야 할 것인지 기로에 서게 되었다.
註 :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할슈타인(Hallstein) 외무차관은, <분단된 독일에 있어서 제3제국의 정통 계승자는 서독이며, 서독은 동독과 수교하는 국가와는 국교를 갖지 않을 것>이라는 원칙을 입안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