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룬의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 문제로 촉발된 할슈타인 원칙 문제에 대하여 장관을 모시고 외무부 간부들과 다각도로 깊이 검토했다. 그 결과, 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의 추세로 보아 우리가 북한과도 수교하려는 기수교(旣修交)국가와 국교를 단절하는 과격 수단을 쓰는 것은 그 제3세계 국가와 북한과의 수교를 방지하지 못했을 경우 우리의 손실을 두 배로 증가시켜 북한에게 이중의 승리를 안겨주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탄력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북한이 야운데(카메룬의 수도)에 대사관을 설치하더라도 우리 대사관은 철수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 추세는 국제 기구에도 파급되었다. 1973년 5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세계보건기구(WHO) 총회에서 북한의 가입안이 통과되어 북한의 UN 및 기타 국제기구 가입을 반대하는 우리의 정책에 구멍이 뚫렸다.
이러한 국제적 현실의 변화는 남북대화와 더불어 우리 외교정책의 기본 전략을 재고하고 중대한 수정을 가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하였다. 이에 따른 정책전환이 1973년 6월 23에 발표된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6․23 선언)註이다.
차관은 그 임무가 장관을 보좌하고 외무부내 실(室), 국(局), 과(課), 원(院) 등, 각 부서의 사무를 종합 조정하며 장관 부재 시 대리하는 것이므로 국내정치상의 문제나 대사 등 고위 외교직의 인사에는 관여하지 못하였다.
내가 차관으로 있는 동안 외무직원에게 특히 강조한 것은 외교 사무능력과 자질향상이었다. 우리 교육제도가 시험을 위한 암기 위주로 젊은 지식인(?)을 양성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외교관의 사고 판단력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작성한 문서의 내용도 깊이가 없고 표현 또한 조잡하고 엉성하여 밖에 내놓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외교문서는 대외적으로 국가의사를 표시하는 문서인데 이렇게 서투른 문서를 내보낼 수 있겠는가. 나라 망신이 아닐 수 없으니 각자 이만하면 됐다고 자만(自慢)하거나 태만(怠慢)하지 말고 국제 수준에 도달하도록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래서 그랬던지 외무부 직원 간에 윤 차관에게 결재 받으러 갈 때에는 조심하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차관 재임 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매주 수요일 오후 청와대에서 모였던 외교안보회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회의는 박 대통령이 친히 주재하고 국무총리, 외무부장관, 국방부장관, 문공부장관,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외교특보 등이 참석하여 외교와 안보문제에 대하여 토의하는 회의로 통칭 청와대 소안보회의라고 하였다. 외무부에서는 물론 장관이 참석하였으나 장관이 가끔 해외출장을 나가게 되어 부재 중에 내가 대리 참석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번은 내가 대리참석을 했을 때, 다른 회의 참석자들이 입을 모아 외무부의 외교정책을 공격하며 특히 UN대책에 대하여 외무부가 안이하고 고식적인 대책으로 시종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나는 직위가 차관에 불과하였으나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나라의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그 의의 몇 국제정세의 변천과 수정의 필요성, 수정의 적정 방향과 한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인지라 나의 발언을 옆에서 가로채는 사람도 없어서 나는 나의 소신을 마음껏 토로하였다. 내 말이 끝나자 자리는 조용하고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이 문제는 윤 차관 말대로 하지.”하고 폐회하였다.
註 6 ․ 23 선언 발췌
그러므로 나(대통령)는 이에 다음과 같은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1. 조국의 평화적 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이다. 우리는 이를 성취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계속 경주한다.
2. 한반도의 평화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며, 남 ․ 북한은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침략을 하지 말아야 한다.
3. 우리는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에 입각한 남북대화의 구체적 성과를 위하여 성실과 인내로써 계속 노력한다.
4. 우리는 긴장완화와 국제협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이 우리와 같이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5. 국제연합의 다수 회원국의 뜻이라면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북한과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6. 대한민국은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 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7.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은 평화선린에 그 기본을 두고 있으며, 우방들과의 기존 우호관계는 이를 더욱 공고히 해나갈 것임을 재천명한다.
나는 이상에서 밝힌 정책 중 대(對)북한관계 사항은 통일이 성취될 때까지 과도적 기간중의 잠정 조치로서 이는 결코 우리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여 둡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