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15일부터 18일까지 알제리(Algerie)의 수도 알제(Alger)에서 열린 77그룹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는 한석진(韓碩鎭) 참사관과 이종업(李鍾業) 서기관이 동행하였다.
1967년 10월 10일~25일에 같은 장소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 최규하 장관이 참석하였다가 연금 상태로 고생한 일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행장에서부터 우리 대표단은 특별 취급하여 숙소도 별장지대의 단독저택에 유숙시키고는 집 앞에는 경호병을 세워서 경비를 하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 대표단은 전부 호텔에 유숙하고 있는데 한국만 특별한 대우, 즉 연금을 당하고 행동을 제한당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보를 하려고 문 밖을 나서니 경호병이 제지하며 못나간다고 하였다. 나는 매일 아침 산보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니 막지 말라고 하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 경호병은 막지는 못하고 몇 발자국 간격을 두고 계속 뒤를 따라왔다.
나는 솔나무가 서 있는 해변가를 약 30분간 거닐다 숙소로 돌아왔다. 한국 대표단이 연금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던지 주 알제리 일본대사가 찾아와, 불편이 없느냐, 외부와의 통신은 되느냐, 음식 등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별 불편이 없다고 대답하고 친절하게 방문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사의를 표하였다.
회의 연설에서 나는 개발도상국의 모임인 77그룹 국가 간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하고, 한국은 이를 위해 모든 가능한 기여를 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회의 종료 후, 전 대표단을 위해 회의 의장이 주최한 리셉션에 참석하려고 연회장으로 가려는데 경호원이 다가와 앞을 막으며 리셉션에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까 의장이 모든 대표를 초청한다고 하였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니, 그래도 못 간다고 막았다.
경호원을 제치고 억지로라도 참석할까 하다가 경호원과 몸싸움이나 벌이게 되면 꼴 좋지 않은 추태가 될 것 같아 그대로 돌아섰다. 이서기관은 잘하셨다고 하며 속으로 내가 고집을 세우고 강행할까봐 걱정을 하였다고 하였다.
1975년 8월 리마에서 개최된 비동맹국가 외상회의에서 북한의 가입이 가결되고 남한의 가입 기도가 좌절된 이후, UN에서의 한국문제 토의는 75년 가을 제30차 UN 총회에서 큰 고비를 맞게 되었다. 비동맹 세력이 최고조에 이른 배경 하에서 한국문제에 관하여 두 개의 상반된 결의안이 함께 통과되는 괴상한 이변(異變)이 생겼다.
이로써 한국문제를 UN에서 다루는 일의 무용성과 낭비벽이 노골적으로 증명된 셈이었다. 그 총회에 참석했던 나는 이러한 결과를 본 후 프랑스 정부와 서명해야 할 협정 관계로 급히 파리로 귀환하였다.
서명할 협정이라는 것은 원자력 발전소용 핵 연료 재처리에 관한 협정이었다. 당시 한국은 10개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 또는 건설 계획 중(그 중 2개, 즉 제9호와 10호 원자력 발전소는 프랑스와 협의 중)에 있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핵연료 재처리 공장 건설은 경제적으로 매우 바람직하였던 것이다.
프랑스가 그 기술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여 이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려는 것이었는데, 미국 측에서 원자 무기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견제에 나섰다. 우리 정부는 오직 평화적 목적을 위해 그 기술을 사용할 것임을 다짐하였으나 미국은 그 기술의 확산 자체를 방지하려는 입장에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또한 미국은 프랑스에 대해서도 자기의 그러한 입장을 통지하였다.
월요일로 예정되어 있던 협정 서명일 사흘 전인 금요일, 프랑스 외무성으로부터 서명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통지가 왔다. 그 이유는 대통령이 이 문제를 직접 재검토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가을 UN 총회 때가 되면 아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 위하여 제3세계 여러 나라에 사절단이 파견되는 것이 상례였다. 한국문제의 UN 총회 상정이 지양된 후에는 비동맹 외교라는 명목으로 사절단 파견이 계속되었다. 나는 이러한 임무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였다. 이렇게 구걸외교를 하고 다니다 보면 우스운 경험도 하게 마련인데, 그 한두 가지 일화를 이야기해 보겠다.
일의 성질상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어떤 나라 대통령은 나에게 북한은 원조를 듬뿍듬뿍 신속히 해주는데 남한은 왜 매년 와서 말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느냐고 힐문하였다. 나는,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 모든 국가 예산이 국회의 심의를 거쳐 통과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 시간이 걸리게 되나 한번 결정하고 약속하면 꼭 지킨다고 다짐하였다.
또 다른 나라의 외상은 남한과 북한이 번갈아 찾아와서 자기 편을 들어 달라고 하니 귀찮아 죽겠다고 하며 좀 오지 말아 줄 수 없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나도 이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