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0월 7일의 일이다. 오전 11시 무렵부터 복통이 나서 오후에는 집에서 쉬었다. 복통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다음날인 8일 토요일 오전, 닥터 도미니크(Dr. André Dominique)에게 가서 진찰을 받았다.
그는 내가 서울에 있을 때부터 앓던 십이지장궤양으로 가끔 진료를 받곤 하던 단골 의사였다. 그는 주사를 한 대 놓고 먹을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복통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으므로 오후 6시쯤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왕진을 청하였다. 저녁 8시쯤 닥터 도미니크가 왔다. 조광제(趙光濟) 공사는 의사가 도착하기 몇 분 전에 문병 차 와 있었다. 의사가 체온을 재보니 체온계는 38도를 가리켰다. 의사는 더 철저한 검사와 관찰을 위하여 느이(Neuilly)에 있는 아메리칸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나는 그때 그 다음 주 소련 코카서스 지방 티빌리시(Tbilisi)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관계 회의(정부간 환경교육회의, 10월 14일~11월 5일)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소련의 입국사증까지 받아 놓았었는데 난데없이 덜컥 입원을 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미국인 의사는 진찰을 하더니 담낭이 부었다고 하며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여러 가지 검사를 더 해야겠다고 하였다. 주사나 한두 대 더 맞고 먹을 약이나 두어 봉지 받아 와서 월요일에 소련으로 떠나려던 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의사에게 중요한 임무로 소련에 가야 하는데 소련에 다녀와서 치료를 할 수는 없겠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길 소련은 이 병이 있으면 빨리 나와야 할 곳이지 들어갈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만약 이 병이 소련 여행 중에 났다면 나는 지금쯤 국립묘지에 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입원 사실을 본부에 긴급 보고하고 다른 사람을 유네스코 회의에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본부에서는 한표욱 주영대사를 회의에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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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네스코 회의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해서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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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의 병상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착잡한 심경을 달래고 있자니 아랍인 남자 직원이 얼음자루를 갖고 들어와 내 아랫배에 올려놓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의 냉기가 차차 피부에 침투해 와서 견디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나는 두 손을 얼음자루와 배 사이에 넣어 찬 얼음이 직접 배에 닿지 않도록 격리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곧 두 손이 시려서 지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나는 ‘여기서 얼어 죽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벨을 눌러 간호원을 불렀다. 간호원이 와서 내가 떠는 것을 보더니 곧 의사에게 연락하였다. 의사는 얼음자루를 보더니 환부를 식혀 주라고 했더니 이렇게 무식한 짓을 했다며 얼음자루를 치웠다. 그래서 나는 우선 얼어 죽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10일 월요일엔 종일 여러 가지 검사와 시험을 받았다. 의사는 담석이 담즙의 유통을 막아 담낭에 염증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며 곧 담낭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하여 서명하였는데 이는 수술 도중에 죽어도 불평하지 않는다는 서약이다.
10월 12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마취에 들어가 의식을 잃었는데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팔뚝에 파리가 앉았는지 간지러운데 이를 시원히 긁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던 일이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깨어나서 눈을 뜨니 아내와 아이들이 와서 지켜보고 있다가 수술이 잘 되었다고 축하해 주었다. 배를 절개해 보니 담낭이 부어서 파열 직전으로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다. 담낭이 터지면 독한 담즙이 내장에 번져서 십중팔구는 죽게 된다고 한다. 췌장을 살펴보니 다행히 췌장은 말짱하여 아무 탈이 없었다 한다.
나는 본부에 수술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런데 내가 소련 여행을 앞두고 급병으로 수술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료들이나 아는 사람들은 “윤 아무개도 이제는 끝장이군.” 하고 나의 재기활동이 불가능할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내가 폐병으로 죽었다는 소문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이다.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나는 차관 시절 서울의 권위 있는 병원에서 십이지장궤양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 후 가끔 복통이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약을 복용해 왔는데 이번에 보니 십이지장궤양을 앓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수술 후 약 일 주일간 더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간호부가 와서 정맥에 영양주사를 놓는데, 정맥을 찾지 못해 주사 바늘을 몇 번이고 찔렀다 빼었다 하니 그 고통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 아가씨는 영국 학생으로 대륙에 건너와 병원에서 풋내기 간호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참이었다.
나는 주사 놓는 것을 중지시키고 간호장을 불렀다. 간호장은 나의 불평을 듣더니 병원에서 책임질 터이니 걱정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 생명인데 만약 잘못 되었을 경우 병원에서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이냐고 반박하고 노련한 간호부로 대치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