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사무총장 발트하임(Kurt Waldheim)이 불원 방한할 계획이 있으므로 빨리 뉴욕으로 부임하라는 본부의 재촉을 받아 1979년 4월 하순 뉴욕으로 향하였다. UN에서 한국대표부는 옵서버(Observer) 자격밖에 없었고, 또 UN이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주권국가 원수에게 제정하는 것과 같은 신임장 제정식은 없고 다만 사무총장(Secretary General)을 방문하여 인사하는 절차뿐이었다.
발트하임 사무총장은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을 지낸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직업외교관으로 단순한 해정 사무적인 역할에 만족치 않고 국제관계에 영향을 행사하며 어려운 국제문제에 공을 세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희망에 부합하는 것이 한국의 통일 문제였다. 그의 정치 보좌관 중에 파키스탄 출신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북한도 평화통일을 하겠다고 하고 남한도 대화로 평화통일을 하겠다고 하니 UN 사무총장이 공정한 중립적 입장에서 양 측을 종용하여 대화를 재개시키고 중간에서 조정을 하면 한국전쟁이라는 일대 비극까지 겪은 제2차 대전 후 최악의 냉전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닌가?” 하고 발트하임 사무총장을 설득하여 사무총장이 한국문제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는 먼저 북한 측과 접촉하여 평양을 방문할 것을 제의하였다. 평양 측에서는 방문 제의는 수락할 수 있으나 단 서울보다 평양을 먼저 방문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남한 측은 사무총장의 노력을 환영하며 평양을 먼저 방문하여도 무방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사무총장은 평양을 먼저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서 남북대화의 중개 알선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그 제의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수락하며 공식적인 회답은 후에 뉴욕으로 보내겠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79년 5월초 서울로 돌아와 5월 4일로 예정된 발트하임 사무총장의 방한에 대비하였다. 박 대통령과 사무총장과의 회담은 5월 5일 오전 청와대에서 있었다. 사무총장은 그 자리에서 평양에서의 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UN 사무총장의 남북대화 중개 알선을 제의하였다.
박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유지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고 발트하임 총장의 노력에 환영의 뜻과 사의를 표명하고는 모든 문제를 윤 대사와 협의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회담에 이어 오찬을 나누면서 우리는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 정세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사무총장은 서울 방문 결과에 대하여 크게 만족스러워 하며 5월 6일 마닐라로 떠났다. 자기의 제의에 대하여 남북한 양측이 모두 환영하고 수락하였으니 시작이 반이라고 이 일은 다 성공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뉴욕에 돌아온 사무총장은 평양으로부터 공식적인 회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공식 회답이 속히 오지 않는 것이었다. 1주일 2주일을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한국문제를 담당하는 페레스 데케야르(Perez de Cuellar) 사무차장은 북한대표부의 한시해(韓時海) 대사에게 북한이 사무총장에게 약속한 공식 회답이 왜 없느냐고 재촉하였다.
한 대사가 평양에 연락하여 마침내 회답이 왔는데, 그것은 한반도의 현 정세 하에서 UN 사무총장의 중재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뉴욕에서 바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
우리나라가 UN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UN 대표라고는 하여도 옵서버에 불과하여 회의를 관찰하기만 할 뿐 토의에 참여하거나 투표할 자격이 없으며, 또 의전상으로도 회원국 대표들에 비해 한 등급 낮은 대우를 하므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매우 유쾌하지 않은 직책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주어진 조건하에서 자존심을 꿀꺽 삼키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UN의 판국은, 비동맹 및 개발도상국가들이 몰려다니며 횡포를 부리는 데 대하여 미국이나 서구라파의 우방들이 1950년대의 위세와 영향력을 상실하고 제3세계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다. 소련과 중공, 동구라파 제국 등, 소위 제2세계는 제3세계를 선동하며 앞장세워 UN을 그들의 선전장화(宣傳場化) 하고 세계평화 유지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의 UN을 무력화하는 데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소련이나 중공은 한국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적대 정책을 취하여 이를 고칠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우리로서는 제3세계 개발도상국가 여러 나라들과의 우호협력 관계를 증진시켜 한국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지를 얻는 길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또한 이제까지는 한국문제 위주로 정치위원회, 즉 제1위원회에서만 한국 대표가 발언을 해왔으나 앞으로는 같은 비회원국인 스위스의 예를 따라 경제, 사회, 문화, 국제법 등 제반 문제에 대하여 각각 소관 위원회에 참석, 발언하고 토의에 참여하도록 노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