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대사인 페르난도(B.J. Fernando) 대사는 UN 내의 비동맹국가 대표들로 구성된 클럽의 회장 격으로 나의 전임자 문덕주 대사가 특별히 소개해 주며 친근하게 지내라고 한 인물이다.
그와 가까워지기 위하여 자주 만나고 식사도 같이 하였다. 골프를 좋아한다고 하여 기회를 보던 중, 마침 문덕주 대사가 뉴욕을 방문하여서 와이카길(Waykagyl)에서 함께 골프를 치기로 약속하였다. 페르난도 대사, 미얀마 대사, 문 대사,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함께 하기로 하고 내가 그의 숙소로 가서 동행하기로 정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곤란한 일이 생겼다. 서울에서 고관이 남미 모국(某國)의 대통령 취임 경축특사로 가는 길에 스리랑카 대사와 골프 약속이 있는 바로 그날, 뉴욕을 경유한다는 급전이 온 것이다. 골프를 취소하자니 시간도 늦었을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큰 불편을 주게 되며, 연기하자니 새로 날짜를 잡는 데 상대방이 순순히 응해 줄는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고관이 오시는데 비행장에 출영을 나가지 않으면 결례가 되어 주 유엔 대사가 자기를 소홀히 대접한 것으로 오해를 할지도 모르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외교냐 내교냐,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뉴욕 총영사에게 비행장에 나가 내가 나가지 못한 사정을 잘 설명드리고 다음날인 일요일에 만찬을 모시겠다고 말씀드리라고 부탁하고, 나는 페르난도 대사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외교를 하교 저녁에 돌아오니 내교가 망가져 있었다. 그 고관은 내가 나오지 않은 것을 대단히 불쾌하고 괘씸히 여겨 내가 모시겠다고 한 만찬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나는 ‘뭘, 내가 내일 찾아뵙고 사정을 잘 설명 드리고 정중히 사과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였으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는 찾아간 나를 냉랭히 대하고 내가 모시는 밥은 드시지 않겠다고 만찬을 거절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박 대통령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 뉴욕 경유시의 일에 대하여도 자세히 언급하겠다고 말하였다. 국익이냐 출세냐, 이것이 문제였다.
외국에 여행하는 수많은 높은 분들의 영접 전송 때문에 외교 공무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일부 의견이 있자 박정희 대통령은 전 재외공관에 대하여 국내인사의 공항출영 전송 안내 등은 공무에 한하여 간소히 하라는 엄명을 내린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엄명은 요령 좋은 사람에게는 출세에 잘 이용된 대신 나같이 고지식한 사람에게는 도리어 피해를 주는 지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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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으로서는 중시해야 했던 제3세계 비동맹 아프리카 국가의 유엔대사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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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유엔 대표부 대사관저로는 역대 대사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으나, 앞으로 제3세계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적극화하려면 그럴 듯한 관저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지대하였다. 대사관저 구입비는 정부가 이미 책정해 놓은 상태로, 구입은 문 대사가 적당한 집을 물색하다가 미결 문제로 나에게 인계한 사항이었다.
뉴욕 북쪽으로 나가면 정원도 있고 풀도 있는 좋은 주택이 있었으나 UN에 가까운 맨하탄 중심지에 집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그 지역은 고려 밖이었다. 10여 채 가량의 집을 보고 다닌 후, 마침 UN 지근거리(Beekman Place)의 타운 하우스(Town House)가 후보로 부상하였다. 3층 건물로 UN 빌딩에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이며 동쪽으로는 강(East River)이 내려다보이는 적호한 위치였다.
다만 파리에서와 같이 수리를 요하는 상태여서 바로 입주는 할 수 없는 것이 흠이었다.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 대사들이 이 집을 보았으나 수리를 요한다는 점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나는 이 집의 위치가 매우 좋고 건물의 기본 골격 또한 건전하며 다만 유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리를 요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가변적인 요소이고 오히려 그 때문에 가격이 저렴할 수 있으니 반드시 큰 흠만은 아니라고 판단, 교섭을 진행시켰다.
그 결과 200만 불에 집을 구입하고 50만 불을 들여 수리하기로 정부에 건의해서 허가를 받았다. 같은 비크만 지구(Beekman Place)에 있는 아파트를 관저로 사용하고 있던 호주의 앤더슨 대사는 파리에서도 같이 있던 대사인데, 내가 좋은 집을 샀다고 부러워하였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고 있다는 소문이 국제사회에 실제 이상으로 퍼져서 제3세계 국가들은 물론 소련에서도 한국을 주목하는 징조가 나타났다. 즉, 소련대표부 측에서 간접적으로 한국과의 국교 개선 가능성을 타진해 왔는데 그 내용은;첫째, 한국과 경제적인 관계를 갖고 발전시키기를 바란다. 둘째, 소련은 대국이니 그 문제를 한국이 먼저 제의하여 주는 것이 좋겠다. 셋째, 소련이 프랑코(Franco) 치하의 스페인과 관계를 맺은 전례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우선 부산에 해운에 관한 출장소 같은 것을 둘 수 없겠는가, 대개 이러한 것이었다.
정부에 보고하였으나 한국에서 돌발한 정세의 급변으로 이 일의 싹은 자라지도 못하고 말라죽고 말았다.
그즈음, 연말쯤 내가 서울로 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서울로부터 들려왔다. 발트하임 사무총장의 남북대화 중재가 불발로 끝나 UN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없어졌으니 연말쯤 서울로 불러들인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