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좌파연합 정권이 들어서자 정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프랑스-북한의 수교를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 그 한 가지 방안으로 프랑스를 잘 아는 윤 대사를 다시 프랑스로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리하여 나를 재차 주불대사로 발령한 것이라 한다.
법경재임(法京再任) (1982넌)
한법상거수만리(韓法相距數萬里)
중차래사비상사(重次來使非常事)
사공련정대승리(社共聯政大勝利)
양국련계고태위(兩國聯繫告太危)
일회주답전생연(一回駐剳前生緣)
유념위국진성력(惟念爲國盡誠力)
연야전전침불매(連夜轉轉寢不寐)
1982년 1월 30일 오를리(Orly) 공항에 도착, 5년 2개월 동안 살았던 대사관저(68 Boulevard Maurice Barres, Neuilly)로 다시 들어갔다. 도시 파리의 모습은 큰 변화가 없었으나 사람은 바뀌어 새 사람들이 정부 요직에 들어 앉아 있었다. 옛 친구들을 만나 새 정부의 정책과 사정을 탐문하고 앞으로의 활동 방안을 모색하였다.
2월 21일 일요일 노신영 외무장관이 도착하였다. 나는 아직 신임장을 제출하지 못한 상태여서 대정부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대사관에서 프랑스 외무성과 연락, 월요일에 노장관이 대통령 비서실장 베레고부와(Pierre Beregovoy)를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함께 엘리제(Elisée) 궁에 갔다.
노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이 미테랑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왔는데 직접 전달해야겠으니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베레고부와 비서실장에게 요청하였다. 베레고부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박절하게 거절하지는 못하고 대통령실로 가서 품의하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따라 나와서 우리 일행과 인사를 한 후 옆방에 가서 잠깐 대화를 하였다. 그는 노 장관의 북한 승인 자제요청에 대하여 “모든 나라와 우호관계를 가지는 것이 프랑스의 기본 정책이며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이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면담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나는 마음이 착잡하였다. 프랑스 대통령이 한국 외무장관에게 자기 입으로 직접 북한과의 국교 수립 방침을 통고한 격이 되었으니 이를 앞으로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
그 다음날, 즉 1982년 2월 23일 화요일 미테랑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바로 그 전날 만났으니 구면인 셈이었다. 한불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의 계속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나의 말에 미테랑 대통령은 주불대사로 다시 온 것을 환영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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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년 주불대사 신임장 제정 시의 기념사진 / 나, 미테랑 대통령, 셰이송 외무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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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궁 측에서는 그로스우브르(François Durand de Grossouvre) 보좌관이 북한문제를 담당하여 미테랑 대통령의 대북한 국교수립 업무를 추진하고 있으며, 외교담당 비서관 베드린(Hubert Vedrine)도 이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프랑스 외무성 장관 셰이송(Claude Cheysson)과 차관 굳만(Francis Gutmann)은 새 사람이었고 그 아래 누아빌(Jean François Noiville) 아주 및 대양주 국장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후에 그는 주 폴란드 대사로 나가고 꽁발(Michel Combal)이 그 후임이 되었다).
이들을 만나 직접 듣거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판단하건데,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는 문제를 쉽게 생각하고 곧 북한과의 국교 수립을 단행하려 하였으나 외무성 전문가들이 신중론을 편 듯하였다. 한국문제의 역사적 배경과 한불간의 전통적 우의, 미국, 영국 등 서방 우방국과의 협조 유대 등,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에 와서는 한국과의 경제관계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으며 특히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프랑스가 참여하고 있으므로 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위험성이 있는 조치는 삼가야 한다는 의견이 강력히 제기되었다고 한다.
엘리제궁 측에서도, 대통령의 대북한 국교수립 방침은 부동이었으나 그 시기에 대하여는 à terme(때가 되면, 조만간, 결국)라는 표현을 써서 한국 측의 반응에 따라 그 시기와 방법을 조정할 수 있다는 인상을 풍기었다.
정부에서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대북한 수교 의사가 확고함에 따라 이를 피동적(被動的)으로 당하는 것보다는 선수를 써서 우리의 우방(友邦)들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제2의 6․23선언 같은 정책선언을 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나에게 문의하여 왔다. 나는 이에 대하여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이것은 마치 중공군이 들어오니까 싸우지도 않고 부산까지 후퇴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는 한국전쟁 시의 일부 논의와 다름이 없는 것으로 무계획한 패배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프랑스가 우리의 저항 없이 북한과 수교(修交)할 경우, 5, 6개국의 서구라파 우방이 곧 뒤따라 북한과 수교할 것이며 이 추세는 곧 전 세계로 확대될 것이었다.
나는 프랑스의 대북한 국교 개선이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우리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프랑스의 움직임에 따라 단계적인 대응과 견제책을 사용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러한 견제방안으로서 원자력 발전소 및 기타 경제협력 중단과 최악의 경우 대사 소환 및 대사대리에 의한 공관 유지 등을 예시(例示)하였다.
우선 셰이송 장관의 방한을 조속히 실현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셰이송 장관도 이에 흥미를 보여 82년 8월 5일~7일 방한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한 이해가 생겨 북한과의 국교수립 문제가 경솔하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엘리제궁의 그로스우브르 보좌관은 북한의 통상 대표와 자주 접촉을 하면서 나와도 가끔 만나 협의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