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 동쪽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코모로(Comores) 공화국의 겸임대사로 임명되어 1982년 6월 28일 수도 모로니(Moroni)에서 압달라(Ahmed Abdallah)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인구 42만에 몇 개의 섬으로 구성된 작은 나라로, 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에 프랑스가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아직 현대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 속에서 잠시나마 정신적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1982년 11월 5일 지부티 압티돈(Aptidon) 대통령에게 두 번째로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그는 78년도에 신임장을 제정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건강하였고 나라 사정도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로스우브르는 1983년 2월 27일~3월 2일에 방한하여 정부 요로와 접촉하며 한국의 사정을 살폈다. 그 후 양국 외무장관 간에 주불대사 어깨 너머로 모종의 교섭(프랑스-북한 수교와 남한-유고슬라비아 수교 교환)이 진행되었다고 하나 성사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로스우브르는 그 동안에도 북한 대표와 연락을 취하며 문제 해결을 계속 모색하고 있었는데, 83년 4월 어느 날 나와 만나 프랑스가 북한과 국교를 수립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물으며 아 측의 반응을 탐색하였다. 나는 한불관계가 극도로 악화될 것이니 그런 일은 하지 말도록 경고하였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이 83년 5월 3일~8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 방문 계획이 81년 미테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북경 방문 후였던 사실을 상기시켜 긴장감이 감돌던 시기였다.
대사관의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란 정부에서는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원자로 발전소 9, 10호 건설 계약을 파기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주한 프랑스 대사에게 통고하는 한편, 4월 24일에는 한전에서 프랑스에 파견하려던 교육훈련생의 출발을 취소시켰다. 당황한 프랑스 측은 한불 간 우호에 장애가 될 아무런 새로운 요소가 없음을 다짐하였고, 이에 이 위기가 해소되어 한전 교육생은 2주일 후에 파리로 출발하였다.
1983년 9월 1일 새벽 일본 북해도 북쪽 근해 상공에서 KAL 007호기가 소련의 미그 23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격추된 사건이 전 국민을 충격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나는 9월 중순에 소련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서 개최되기로 되어 있던 UNESCO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기 위하여 소련의 사증도 받아 놓고 있었으나, 정부에서는 이러한 시기에 소련을 방문하는 것은 아무리 UNESCO 국제회의라 하더라도 온당치 못하고 하여 참석을 금지하였다.
6년 전 티빌리스 회의(정부 간 환경교육회의) 때와 같이 불가항력에 의한 장애였다. 나는 타슈켄트에 가는 대신 때마침 개회 중이던 UNESCO 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 회원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요청하여 발언권을 얻어 소련의 비인도적인 민간 여객기 격추 만행을 통렬히 비난 공격하였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랑군 아웅산 묘소에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김동휘 상공장관, 함병춘 비서실장, 이계철(李啓哲) 대사 등, 17명의 대통령 공식수행원이 북한의 테러 행위에 의하여 참사당한 비극이 발생하였다.
이 희생자 중 이 외무장관, 김 상공장관, 함 비서실장 및 이 대사는 내가 잘 알고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다. 특히 이 대사는 독일 본에서 카이로에 같이 가서 공관 창설을 위해 함께 고생하였고, 주 UN 대표부에서는 공사로서 나를 성실히 보좌하다가 주 미얀마 대사로 임명되어 떠났었다. 미얀마로 떠나면서 공관장이 되어 기뻐하던 보습이 엊그제 일같이 눈에 선한데, 참으로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의 겸임국인 코모로 공화국이 북한과 막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니 가서 이를 번복시키라는 지시가 와서 코모로 방문길에 나섰다. 이 출장은 북한의 랑군 만행의 진상을 코모로 정부에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이로비에서 코모로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기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으므로 킬리만자로 산록(山麓)에 있는 자연동물원에 가보기로 하였다.
사파리 호텔(Safari Hotel)에 방을 정하고 곧 동물 구경 차 나섰다. 우리는 그곳에서 사자, 코끼리, 기린, 들소, 얼룩말(斑馬), 치타, 리노세로, 영양(玲羊), 하마(河馬), 원숭이, 여러 가지 새 종류 등, 많은 동물들을 보았다.
안내인은 사자가 사냥하는 것을 보여준다며 이리저리 차를 몰며 쏘다니다가 한참 만에 암사자 세 놈이 관목 옆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니 사냥하려고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털퍼덕 자빠져서 조는 듯 마는 듯 눈을 떴다 감았다 하고 있는 것이었다.
멀리서 지나가던 들소 한 마리가 어쩌자고 사자 쪽으로 가까이 와서는 멍청하니 사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이 놈들은 가까이 와 있는 들소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 닭 보듯이 하는 것이었다. 들소가 물러간 후 이번에는 여섯 마리의 반마(斑馬)가 가까이 와서는 아무 공포도 없는지, 또는 공포에 질려서 마비되어 버렸는지 얼어붙은 것같이 서 있다. 참으로 이상할 지경이다.
안내인에게 물으니, 사자는 배가 부르면 아무리 맛있는 먹이가 코앞에 있어도 이를 잡지 않는다고 한다. 즉 일용할 양식으로 족하고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배가 고프면, 즉 필요하면 사냥을 하는데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는 들소나 영양 등을 공격한다. 공격을 받은 들소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 내빼는데 사자는 맨 꼴찌로 뛰는 놈의 뒷다리를 덥석 물고 늘어진다. 그러면 붙들린 놈은 한 삼사십 미터 정도 더 뛰다가 지쳐 나자빠진다.
이렇게 되면 사자는 자기 식구들을 불러 자기도 먹고 새끼들도 먹인다. 사자들이 먹다 남긴 나머지는 들개 같은 다른 짐승이나 독수리, 까마귀 등이 먹어치워 깨끗이 소제한다. 그들은 먹고 먹히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며 거기에 아무런 불평이나 불안이 없는 것 같다. 초식동물들은 풀이나 나뭇잎을 뜯어먹고 사자나 치타 등 육식동물은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다. 거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윤리적 가책이 없다.
이 속에 사람을 발가벗겨 집어넣고 살아보라면 어떻게 될까? 동행한 김 참사관이 대답하길, “사람이 사자를 모조리 잡아먹고 말 걸요.”라고 한다. 그럴 듯하다. 사람과 같이 필요 이상으로 탐욕적이고 독하고 지배욕이 강하며 투쟁적인 동물은 없을 것이다. 자연, 동물 인가! 인간의 운명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의 지능은 악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