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속에서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 중 다음 구절이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 갑오년(甲午年 : 선조 27년, 서기 1594년) 8월 29일
날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했다니 이는 천고에 탄식할 일이다.
— 갑오년 9월 3일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密旨)가 들어왔는데 <수륙(水陸)에서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도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 했지만 3년 동안 해상에 있어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맹세하고 죽음으로써 원수 갚을 뜻으로 날을 보내지만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소굴 속에 들어 있는 적이라 경솔히 나가 칠 수는 없는 일이요, 또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번 싸워도 위태함이 없다> 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불 밝히고 혼자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국사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 정유년(丁酉年 : 선조 30년, 서기 1597년) 4월 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고통과 슬픔 속에 허덕이는 조국을 위하여 외교전선에서 30여 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국익 수호에 노심초사한 결과가 외교 실패의 문책을 받아 불려 가는 몸이 되었으니 신세한탄을 하면 무엇하랴.
1985년 1월 4일 김포공항에 내리니 공항에는 신문, TV 방송 등에서 많은 기자들이 나와서 눈이 부시도록 사진을 찍어댔다. 내가 상당한 흥미 기사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문득 우스운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충무공이 체포되어 남대문에 들어왔을 때 만약 당시에 사진기자들이 있었다면 사진을 많이 찍어댔을 것이라는.
나는 본부와 청와대에 북한 일반대표부 승격 문제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앞으로의 대책으로서 프랑스 정부의 의사와 방침, 즉 북한과 외교관계 수립 의사가 없다는 것을 프랑스 수상이 서울에 와서 직접 우리 정부에 통지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부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사실대로 납득하고 프랑스 수상의 조속한 내한을 교섭하라는 지시를 주었다.
파리로 돌아온 나는 프랑스 측에게 “내가 서울에 가서 프랑스 정부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의사가 없으며 이때까지의 북한 수교 문제는 일반대표부로 매듭지은 것임을 설명하였으나, 서울에서는 나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파비우스(Laurent Fabius) 수상이 서울에 와서 직접 프랑스 정부의 방침을 천명하여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하자.”고 설득하였다. 프랑스 정부도 사태 수습에는 그 방법이 좋겠다고 납득하여 파비우스 수상이 85년 4월 7일~9일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서울에 온 파비우스 수상은 대통령을 예방하여 프랑스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하여 한국 국민이 반대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겠다고 확언하였다. 이 말은 한국이 반대하는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하지 않겠다는 말의 외교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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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교실패를 물어 나를 소환했지만 그 후 방한한 프랑스 파비우스 수상은 북한에 대한 불승인을 확언했다 (1985. 4.8.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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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1981년 사회당 집권 후 한불관계를 긴장시켜 오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1988년 대통령에 재선되어 장기집권을 누리고 있으나 지금까지 북한과의 외교관계는 수립하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서울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지난 번 나를 서울로 소환하였을 때 파리로 조사관을 보내어 나의 부재중에 외교 실패의 현장조사를 한 바, 그 조사관은 윤 대사가 교민회에 보조금을 많이 안 주고 KAL기 격추 시에는 소련 비난 홍보를 많이 안했다는 불평을 듣고 돌아왔다고 한다.
1985년 봄 서울올림픽에 대한 소련 중공 및 동구라파 제국의 참가문제가 중요한 국제적 관심이 되고 있었다. 소련이나 중공은 체육이 자기 나라 공산체제에서 점하는 중요성 때문에 서울올림픽에 꼭 참석하고 싶은데 북한이 이에 적극 반대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북한의 체면을 살리며 서울올림픽에 참석할 수 있겠는가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이탈리아 외상 안드레오티(Andreotti)가 올림픽 경기종목 중 2, 3개를 북한에서 개최하도록 할애하는 안(案)을 제시하였다. 소련에서는 이 안이 북한의 반대를 완화시키고 그 체면을 살려주는 묘안으로 생각하여 그 실현을 위하여 은밀히 움직였다. 그때 주 프랑스 소련대사는 보론초프(Youli Vorontsov)였는데, 그는 국제적 운동기구상(運動器具商) 아디다스(Adidas)의 알선으로 샹젤리제에 있는 로랑(Laurant)이라는 유명한 고급식당에서 나와 만찬을 같이 하게 되었다.
보론초프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는 노련한 외교관으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좀 하다가 본론에 들어가 서울올림픽 문제를 의논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북한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는데 만약 서울 측에서 올림픽 경기 두세 종목(a few games)을 북한에서 개최하도록 양보하여 준다면 이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 올림픽 경기종목이 전부 서울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예비경선 등은 지방도시에서 행하는 것이 많이 허용되고 있으니 북한의 한두 도시에서 경기를 행한다 해도 올림픽 규칙상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은 후, “만약 서울 측이 두세 종목의 북한 내 실시에 동의할 경우 북한은 이를 수락하고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그는 “물론이지요. 쌍수를 들어 박수갈채 할 것입니다(Of course! They will applaud.)."라고 장담하였다. 나는 우리가 의논한 내용을 서울 책임당국에 충실히 보고하겠다고 약속하고 기분 좋게 만찬을 끝냈다.
그러나 북한은 결국 이 타협안을 수락하지 않았다. 생각하건대 소련으로서는 국내 사정, 동구라파 사정, 중공 사정 등, 모든 정세를 종합하여 서울올림픽 참가의 불가피함을 이미 결정했던 것 같다. 다만 맹방인 북한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하여 경기 일부의 북한 개회안을 강력하게 북한에게 권유하였으나, 북한이 끝내 이 타협안을 수락하지 않았으므로 자기들로서는 북한을 위하여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였다는 생각으로 거리낌 없이 서울올림픽 참가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