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의 죽음
앞 집 마루에 동네 아이들이 대여섯(모두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모여들어 제멋대로 재잘거리고 있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까, 한 아이가,
“하나님 사진이 있니?” 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있지 그럼 없어?” 다른 한 아이의 대답이다.
“어디 있는데?”
“왜, 저 십자가에 달려 있는 사진 있잖아.”
“그게 예수님 사진이지, 하나님 사진이야?”
"없으면 새로 하나 찍지 뭐.“
어디까지나 항변이다. 또 다른 한 아이가 나서며,
“하나님은 천장에 있다. 천장에서 가끔 내려 와. 그리고 하나님도 총으로 쏘면 죽는다.”
나는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후, ‘하나님은 과연 죽는 것인가?’ 하고 일견(一見) 어리석게 보이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신(神)의 죽음’이란 도대체 모순된 두 개념의 불합리한 결합임에 틀림없다. 묵시록(黙示錄)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끝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신은 자신이 영원자존의 무한자임을 명백히 하였다. 생(生)과 사(死)는 유한자인 인간, 아니 생물계에나 타당한 개념이지, 결코 무한자요 절대자로서 상념된 신에게는 타당치 않은 개념인 것이다.
그러면 과연 신은 죽지 않는가? 중세 영국의 스티븐왕 시대는 역사가에게 무정부시대로 알려진 시기이다. 국정이 극도로 문란하고 무력하여 봉건제후는 서로 싸우고 약탈하며, 대로에는 비적들이 횡행하여 백성은 가렴주구와 생명 재산의 위협에 전전긍긍하였다. 이러한 무질서는 필연적으로 약육강식의 상태를 현출(現出)하였고 정의와 인도(人道) 대신에 불의와 죄악이 발호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주(主)는 주무시고 계신다’라고 하여, 이 무법상태를 풍자적으로 합리화하였다.
사실 악(惡)을 벌(罰)하고 선(善)을 상(賞) 주시는 정의의 신(神), 각인(各人)의 행동과 마음 속을 항상 가찰하시는 전지전능의 신이 살아 계시다면(살아계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어찌하여 이러한 불의가 용인되고 있는가. 아니 용인될 뿐만 아니라 악에게 벌 대신 도리어 상이 돌아가고 있는가. 이것은 신이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것과 동일한 상태, 즉 수면 중이라고 설명하지 않는 이상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주를 창조하고 자존자(Ego sum qui sum. 출애굽기 3장 14절)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자로서의 신에게 물론 <사(死)>라는 것은 없다. 그에게는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으며 영원한 생성(生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과 관계를 갖고 그의 마음 속에 거(居)하며 그를 통하여 역사를 창조하고 경영하는 신, 즉 인간을 작은 동사자(同事者)(Junior Partner)로서 포용하고 사역(使役)하는 신은 인간의 결정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신을 배척할 때, 신은 그 사람에게 죽은 것이며, 개인 뿐만 아니라 한 사회 한 시대가 신을 저버릴 때, 신은 그들에게 있어서 존재할 수 없고, 결국 죽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우리나라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요새 가끔 생각한다. <우리 사람들이 이렇게 못되게 굴고 망할 짓만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우하시겠는가. 우리가 신을 죽이는데 하나님이 살아서 우리를 돕겠는가. 신은 우리나라 이 시대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즉사(生卽死) (1985년 2월 7일)
사는 것은 죽는 것이다.
하나의 현상(現象)을 보는 각도가 다를 뿐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은 삶의 종착이자 목적이다.
출생(出生)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맹목적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나
모든 생물(生物)은 죽음이라는 기정(旣定) 목적을 향하여
숙명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결승선이 달리기 경기의 종착점이자 목적지인 것 같이
죽음은 삶의 종말이요 목적이다.
삶은 그 자신 맹목적이나 죽음이 목적을 부여한다.
죽음은 생즉사(生卽死)라는 한 과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이 과정을 총괄하고 합목적적으로 정리하여
우주의 대질서 속에서 제 자리를 찾게 하고 역할을 부여하며 보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삶의 반대 또는 적으로서
배척하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 부여자로서 환영하고 포섭하고 협력하는
동반자 아니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 끝났다. 또는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
육체적 생명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사명을 이루었다.
즉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가상의 죽음을 떠나서
예수의 일생을 어떻게 완전히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산상수훈이나 그 외의 예수 생시에 행한 교훈과 행적은
십자가의 궁극적인 희생적 죽음을 준비하는 서론에 불과하고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그 의미가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의 생애를 지배하고 의미있게 하고 결정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니
죽음과 삶이 융합되고 동일함을 증명하는
가장 웅변적인 실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삶은 죽음이요, 모든 생명은 죽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구별할 수 없는 하나요,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의 완성이다.
죽는 순간의 자태는 추할 수 있으나
그것은 죽음의 전부가 아니며 최종 국면에 불과하다.
죽음은 긴 과정이며
삶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story)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