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4월 나는 외무장관에게 프랑스에 다시 간 임무가 끝났으니 이제 본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여 동의를 얻었다. 1985년 4월 30일 본부 근무로 발령을 받아 5월 31일 나는 공사 간에 시련 많은 주불대사 재수를 마치고 해외생활 11년 3개월 만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후 행정담당 이용준 서기관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용준 서기관의 편지>
존경하옵는 대사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이제야 문안 여쭙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지난번 경유하실 때 뵈올 기회가 있었으나 손님이 겹치는 바람에 저만 얼굴을 내밀지 못한 듯합니다.
사람이건 역사건 세월이 지나야 올바른 심판이 되듯이 이곳에 계실 때는 상하의 차이가 너무도 크고 대사님의 엄격하심이 무섭기만 하며 어렵게만 느껴지던 대사님이었는데, 이제 떠나가시고 거의 1년의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옛날 외무부 선배님들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었던 대사님의 훌륭하심이 몇 배나 더 강렬하게 가슴에 느껴집니다.
대사님께서 주불대사로 계시는 동안 워낙 제 위치가 위치인지라 일다운 일은 배우지 못하고 겉돌던 것이 무척이나 아깝게 느껴지오나, 비록 멀리서나마 대사님의 굽힐 줄 모르시는 곧은 성품과 청렴하심을 접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웠습니다.
지난 해 감사 때는, 이제야 말씀올립니다만은,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감사관들이 처음부터 무언가 잡아내려고 거의 혈안이 되어 있었사오나 대사님이 아시다시피 뒤집어놓고 털어도 진정 먼지 한 방울 못 찾아낼 공관이었기에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 자질구레한 지적들만 하고 갔었습니다.
대사님 이임 얼마 전에 공관에 출처가 미상인 돈 4만 프랑이 생겨서 대사님께서 상조회비로 쓰라고 하신 일이 생각나시는지요. 감사관들이 제 서랍을 마구 수색하다가 그 돈을 발견하고는 희색이 만면하여 한때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고 기뻐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은 대사님의 청렴하심에 감복되어 이를 묵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인즉, 저와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정해웅 서기관이 그들 앞에서 대사님의 인품과 청렴하심에 일장연설을 한 후, 대사님께서 관저 전화요금 내라고 제게 맡기고 가신 $200 수표를 보여 주었지요. 이 나라 역사에 이런 일을 할 만큼 청렴한 공관장이 과거에건 미래에건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말을 마치고 나니 눈에 눈물까지 어리더군요. 대사님을 모신 것이 그때처럼 당당하고 자랑스러웠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 살기등등하던 감사관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고 따라서 안기부 측에서는 아무런 지적 사항도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수표 건은 대사님의 훌륭하신 뜻에 따라 관저에서 서울로 전화하신 리스트를 뽑으려고 수차 노력하였으나 불란서 전화국이 워낙 전근대적이어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여 이제야 그 수표를 대사님께 다시 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록 먼 곳에 계시오나 대사님을 항상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사오며 운이 닿는다면 대사님을 모시고 다시 한 번 일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이 해도 대사님 앞길에 무궁한 영광과 성취가 있으시기를 빌며 또한 건안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86년 1월 8일
주불 이용준 올림
이원경 외무부장관은 나에게 외교에 관하여 자문 역할을 하여 달라고 하였다. 6월 28일 국토통일원 장관이 나를 정책자문위원회 통일대화분과위원으로 위촉하여 남북대화사무국에 가끔 나가는 외에는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1년 후면 외무공무원법에 의하여 정년퇴직을 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평소에 외교, 행정, 남북문제에 대하여 느낀 바를 정리하여 몇 가지 건의서를 썼다. 1985년 11월 <경제외교 강화를 위한 건의>를 작성하였다.
그때까지는 대외원조가 UN 총회 지지표 획득을 목적으로 즉흥적, 임기응변적으로 시행되어 상대방 정치인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식이 되어 버렸지, 그 나라 국민에게 이익이 되고 지속적으로 경제에 보탬이 되는 원조가 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낭비적 병폐를 시정하여 계획적이고 지속적이며 상대방 국민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참된 우호관계를 조성해 나가자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이것을 정부 관계부처에 배포하였는데 청와대 사공일(司空壹) 경제수석비서관이 관심을 갖고 경제부처와 협의하여 경제외교의 효율화 방책을 강구하였다. 이것이 1987년 발족한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의 창설 등, 일련의 조치 마련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 줄로 안다.
1986년 1월 중순에는 <남북대화에 대한 고찰-기본전략 구상을 위하여>를 작성하였다. 이는 약 1년 동안 남북대화의 자문위원으로 대화 진행에 참여한 결과 느낀 의견을 정리한 것이다. 남북대화에 있어서 북한은 확고부동한 목표와 기본전략이 있어서 이 목적과 전략에는 변함이 없고(이것이 그들의 기본적 약점이기도 하다) 다만 전술 또는 방법에 있어서 상대방을 혼란케 하는 제한된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남한 측은 전략과 전술, 원칙과 방법, 목표와 과정이 분명히 정립되지 못한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남북대화의 진행에 있어서 이 점들을 명확히 정립하고 진행에 있어서도 단기, 중기, 장기의 진행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논하였다.
1월 말에는 <외무행정 개선에 관한 건의>를 작성하였다. 외무행정개선에 대하여는 여러 각도에서 개선할 점이 많으나 정치권력의 차원에서 다룰 문제는 차치하고, 외교관의 질적 향상과 외교의 다변화, 다원화에 수반하여 필요한 우수한 전문직 외교관 양성의 필요성 및 이렇게 양성된 전문인력의 인사상의 활용을 논하였다. 얼마 만큼이나 참고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나의 할 일을 하였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