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및 통신의 발달과 더불어 국제간의 접촉과 교류가 증대하고 가속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추세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국제간의 교류는 서로 다른 언어와 개념의 상호이해 또는 수용을 수반하기 마련으로, 점점 좁아지는 지구 어느 한 구석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물건(예 : Television, Computer 등)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 통용될 때 그 물건의 이름이 그대로 다른 나라 말에 채납(採納)되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문물을 수용하는 태도에는 서너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무시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폐쇄 고립주의로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다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실제로 그 물건이 쓸모가 있어서 사회에 유입, 통용되고 있을 때 그에 자국말로 출산지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다. 호(중국)배추, 왜(일본)무, 양(서양)자기 등이 이런 예이다.
또 하나는 그 물건 이름의 뜻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Telephone을 전화로, Telegramme을 전보로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렇게 뜻을 자국어로 번역할 수 없거나 매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즉, 고유명사는 이를 번역하는 것이 무리이므로 이를 그대로 자국 글자로 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이두(吏讀)와 같이 한문자의 음을 뜻과 상관없이 따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고르바초프⌟를 ⌜과이파교부(戈爾巴喬夫)⌟라고 쓰는 것이 그것이다. 중국은 문자의 나라이므로,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15만 자가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래 한문 글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로서 글자 한 자가 그대로 낱말이 된다.
또한 중화사상(Sino-Centrism)의 자존심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자국 문자로 의역하는 것이 통례인데, Computer를 전뇌(前腦), Fax를 전진기(傳眞機), Helicopter를 직승기(直昇機)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Tank는 단극(担克)이라고 표시하여 음을 모사(模寫)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Coca Cola를 가구가락(可口可樂:입을 즐겁게 한다)이라고 하여 비슷한 음에 좋은 뜻을 곁들이는 재주를 부린 것도 보인다.
일본은 선진 문물을 저항 없이 수용하는 역사적 전통이 있으며, 거기에 외국의 유행을 잘 따르는 기질도 가세하여 외국어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다만 외국어의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제약과 축소지향의 성격이 작용하여 외국어를 짧게 만들어 사용하며, 인쇄물에서는 가타가나((片假名)를 사용하여 외래어임을 표시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와 같이 무절제하게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그 여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자국어의 우수성을 자랑하며 신경질적으로 그 순수성을 지키고 외국어의 침입을 막으려고 애쓰는 프랑스에서도 Meeting, Weekend 등의 영어를 일상생활에 쓰고 있는 것은 어떤 개념이나 어휘가 번역하기 어려운 독특함과 편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서울 거리에서 ⌜포 시즌⌟이라는 식당 간판을 본 일이 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간판 구석에 ⌜Four Season⌟이라고 조그맣게 쓰여 있었다. 뉴욕에 ⌜Four Season⌟라는 고급 식당이 있는데 이 이름을 본따서 붙인 한국식 이름인 모양이다. 또 거리에는 ⌜쇼파 고침⌟이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아마도 Sofa를 고치는 가게일 것이다. 서울에서 좀 떨어진 시골 길가에서 ⌜콜푸⌟라는 간판이 붙은 Golf 연습장을 본 일이 있다.
또 ⌜텔레비전⌟에서 ⌜개그맨⌟들이 ⌜폼⌟을 재고 ⌜팬⌟들의 갈채를 받는다고 하니 혀 짧은 반벙어리 사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에 홍수와 같이 쏟아져 들어온 외국어로 인하여 야기된 혼란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외국어 발음의 부정확한 이해 또는 한글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외국어 발음이 있기 때문인 바, 외래어의 표기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는 문제를 고찰하여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글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 28자의 표음문자로서, 과학적 ‧ 조직적으로 되어 있으며 배우기 쉽고 일상생활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바람 소리, 학(鶴) 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무엇이든지 소리나는 대로 글자로 표현해서 기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새 유행하고 있는 외래어 중에 재래 한글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음을 들어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영어의 F, G, L, V, Z 그리고 프랑스어의 R과 독일어의 CH, 일본어의 ガ、ザ 등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28자 중 ㆆ, ㆁ, ㅿ, ㆍ의 네 자는 일제 말, 조선어학회에서 현대 우리말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지하여, 현재는 24자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폐지된 네 자 중, ㆁ은 훈민정음의 설명에 의하면 ‘엄소리니 業(업)자 처음 펴내는 소리 같으니라’고 하였다. 사실 이 음은 현대 우리말에도 남아 있는데, ⌜영업(營業)⌟이라는 말을 발음할 때 나오는 ⌜업⌟의 음이 바로 그것이다. ⌜방아⌟, ⌜붕어⌟ 등, ㅇ이 종성으로 끝나는 말 뒤에 모음이 따를 때 ɧ음, 즉 영어의 G와 일어의 ガ행의 초성음과 비슷한 발음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ㆁ음이 다른 엄소리인 ㄱ, ㅋ과 같은 계통의 음임에 틀림이 없으며, 업(業)의 일어 발음이 ゲフ이었음도 참고할 만하다.
ㅿ는 ‘반잇소리니 穰(양)자 처음 펴내는 소리 같으니라’고 하였다. 글자 모양이 기타 잇소리 ㅅ, ㅈ, ㅊ과 비슷하여 같은 계통의 음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穰(양)의 일어 발음이 ジャウ인 것과, 임진왜란 때 출간된 일어 학습책에 ⌜ゴザイマス(고자이마스)⌟가 ⌜고ㅿㅏ이마스⌟라고 쓰여 있으므로 ㅿ가 ザ행의 음, 즉 Z음이거나 이와 가까운 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ㅿ를 부활시켜 Z음으로 사용할 경우, Ozon을 오존, Cheese를 치즈라고 하는 혀 짧은 병신 노릇을 면하게 될 것이다.
ㆆ은 ‘목소리니 把(읍)자 처음 펴내는 소리 같으니라’고 하였다. 현대 우리말에 이 음이 없고 아랍어의 모음 이외의 외래어 표기에 이 글자를 사용할 필요가 그다지 없으므로 이 글자의 회생 문제는 덮어 두기로 한다.
ㆍ는 조선어학회에서 사용을 폐지하기 전까지는 ‘아래 아’라고 하여 ㅏ 자(字)와 같은 발음을 하고 ⌜아해⌟라고 쓰는 대신 ⌜1⌟라고 썼었다. 만국발음기호의 ʌ음과 같은 음으로, ㅏ와 ㅓ의 중간음이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없어진 것이 사실이고 다만 제주도에서 말(馬()을 ⌜2⌟로 발음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외래어 중 ʌ음(영어의 Sun, Cut)이 포함된 말을 원어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ㆍ의 부활 사용을 고려해 볼만도 하다.
편집자 註 : 글자를 지원하지 않아 본문의 숫자 표기에 들어가는 문자는 위와 같으니 참조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