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V자 음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ㅂ밑에 ㅇ을 붙여 씀으로써 ᄫ 음, 즉 약한 ㅂ음을 표시하였는데, 지금의 V음에 견줄 수 있을 줄로 안다. 이 글자도 폐지되어 있으나 소생시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외래어 발음 중 글자가 없어서 가장 곤혹을 느끼는 것은 F음이다. 우리 한글에 정확하게 이 음을 표기하는 글자가 없어서 ㅍ 또는 ㅎ을 대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보급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개 Coffee, Form, Fan, Fax 등을 발음할 수 있고, 실제로 다방에 가서 <Coffee 주세요> 하는 사람이 더 많지, <코피 주세요> 한다든지, 일본사람마냥 <코오히(コーヒー)주세요>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런데 다만 글자로 쓸 때에 이에 맞는 글자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 <코피> 달라고 해야 되니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때 백성의 일상 사용에 편리하도록 한글을 만드셨는데 이제 와서 불편을 겪게 되어서 되겠는가.
훈민정음에는 초성(初聲)에 오직 하나의 자음 글자만 쓰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전탁음(全濁音)인 된소리는 ㄲ, ㄸ, ㅃ, ㅉ, ㅆ과 같이 자음을 연기(連記)하여 만들었고, 조선어학회가 폐지하기 전까지는 ᄭ, ᄲ, ᄯ 등으로 된소리를 표기하였던 것이다. 또한 ⌜뜻(意:의)⌟을 ⌜1⌟이라 하였고 ‘모매 ⌜2⌟는 것이라(身之用)’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아도 (소학언해무인본(小學諺解戊寅本) 초성에 두 개의 다른 자음 글자를 병서(竝書)하는 것이 훈민정음의 통상법칙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종성(終聲)에는 닭, 밝, 삶, 값, 앉다(座) 등, 자음의 병서를 거리낌없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P와 H의 중간 내지 복합음인 F(PH)를 ⌜3⌟로 표기하는 것은 훈민정음의 법칙, 관행에도 합치되고 필요와 편리에 따라 글자를 창제한 기본정신에도 부합되는 일이라 하겠다. 이 원칙이 채택된다면 우리가 외래어의 사용으로부터 겪는 외국어 발음 표기의 어려움은 거의 다 해소될 것이다.
L음은 우리말에 종성 ㄹ과 초성 ㄹ이 연결될 때 나는 음이다. 예컨대, 얼룩지다, 걸러먹다, 흘리다 등을 발음할 때 L자 음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L자로 시작되는 외래어는 ᄙ을 사용하면 된다. 19세기 말 Lamp가 들어왔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남포라고 새로운 말 비슷한 것을 만들어 불렀지만, 구태여 원어를 충실하게 표시하자면 ⌜4⌟프라고 쓰면 되었을 것이다.
독일어에 CH(만국발음기호 X, 예 : Tochter)는 ㆅ로 표기할 수 있으며, 프랑스어의 R은 굳이 정확하게 표시하고 싶으면 ㅎㄹ라고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이 원칙을 활용한다면, 영어의 TH음, 즉 ð, ɵ 및 기타 어떠한 외국어 발음도 적절하게 표시할 수 있을 것이며 그야말로 바람 소리, 새 소리도 다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부언하고자 하는 바는 한글에는 없으나 우리말에 엄연히 존재하는 모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鄭(정)⌟, ⌜丁(정)⌟ 등 성씨(姓氏)를 칭하는 ⌜정⌟, ⌜어사(御史)⌟라는 ⌜어⌟, ⌜정직(正直)⌟이라는 ⌜정⌟, ⌜어른⌟이라는 ⌜어⌟, ⌜성질(性質)⌟이라는 ⌜성⌟ 등, ㅓ로 쓰여지는 중성음(中聲音)으로서 ⌜정거장(停車場)⌟의 ⌜정⌟, ⌜저기 저곳⌟하는 ⌜저⌟, ⌜어둔 곳(暗處)⌟의 ⌜어⌟ 등과 다른 음이다. ⌜여론(輿論)⌟과 ⌜여행(旅行)⌟도 같은 발음상의 차이가 있다. 이 음은 ㅓ와 ㅡ의 중간음인데 따로 독자적인 글자가 없이 ㅓ 글자를 공용하며,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발음하고 있는 형편이다. 훈민정음 28자 중 이렇게 한 글자가 두 개의 음가를 갖는 것은 이것이 유일한 예인 듯싶다. 당시에는 이 중간모음이 우리말에 없었는지, 또는 있었는데도 이를 간과하여 따로 글자를 만들어 배당하지 않았는지, 천학(淺學)의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여하간 이는 우리 한글의 미흡한 점이며, 이 중간모음에 별도의 글자를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종대왕께서는 없던 글자를 우리말의 필요에 따라 창제하셨는데 20세기 말의 우리 개명한 한글학자들이 모음자 하나 보충할 수 없을 것인가. ㅓ와 ㅡ의 중간 내지 복합음인 점을 고려하여 ㅢ같은 글자를 만들 수도 있을 법하다.
이상 외래어의 한글 표기에 관하여 평소 느끼던 바를 간략히 적어보았다. 확실히 말해 두거니와 필자는 외래어를 많이 쓰자거나 또는 가급적 배척하자거나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며, 관심 있는 분이 있다면 별도로 논할 문제이다. 다만 싫든 좋든 상당한 정도로 외래어가 통용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불필요하게 억지로 반벙어리 소리를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우리의 시대적 필요를 쉽게 충족시키는 방법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폐지된 글자를 부활, 활용하고, 훈민정음의 구성 원칙에 따라 글자의 초성에 자음을 병서하는 방법으로 모든 외래음을 표시하며, 또한 한글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는 문제를 제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기본정신에 부합하는 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편집자 註 : 글자를 지원하지 않아 본문의 숫자 표기에 들어가는 문자는 위와 같으니 참조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