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외교와 내정(內政)은 엄격히 구별되는 대조적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어, 외교는 잘하는데 내정이 엉망이라든가, 내정은 잘하는데 외교가 치졸(稚拙)하다든가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사실 외교는 나라의 대외적 관계를 다루고 처리하는 일이며, 내정은 국내정치에 관한 사항을 다루고 처리하는 일로서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내의 일이 어렵고 잘 안 풀리면 외교 방면에서 어떠한 탈출구를 모색하고 득점을 하여 내정 상의 실점(失點)을 보충하려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외적인 모험을 감행하여 국민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려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일도 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고, 나라와 백성에게 막대한 재난을 안겨주고 그 자신도 패가망신하는 일이 역사상 비일비재한 것이다.
근대 국제법상의 원칙 중에 내정불간섭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이 일은 국내 사항이므로 외국이 간섭할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이 그대로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 나라가 출입금지의 팻말을 써 붙이면 그대로 존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아무리 국내 문제라 하더라도 인류 공동의 관심사에 대하여는 한 나라의 위정자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인권 문제, 인류에 대한 범죄 등이 그것이다. 최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Kurd) 족을 학살하는 데 대하여 국제사회가 분노하고 상당한 억제책을 강구하려 하며, 또한 환경 훼손 행위를 규탄하고 환경 보호를 위하여 전 인류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점차 강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점차 지구가 좁아져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으며, 국가 주권(主權)의 절대성이 여러 가지 제약에 의해 마멸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권은 밖으로는 여러 가지 국제기구, 국제법규, 조약, 협정에 의하여 제약 ‧ 수정되고, 안으로는 소수민족과 종족 및 각급 단위 지방단체의 자치권에 의하여 제한되어, 고전적 의미의 제한받지 않는 최고 권력으로서의 주권(Sovereignty)이라는 개념이 그대로 인정되고 통용될 수 없게 되었다.
외교와 내정의 엄격한 구분이 어려운 이유는 이들이 국가 통치의 기능적 구분에 불과하며, 통치의 목적인 국리민복(國利民福)에 기여하는 수단이라는 데에 있다. 신명재산(身命財産)의 안전과 보호, 공공법질서(公共法秩序)의 유지,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준말인 경제, 즉 백성의 물질적 생활 수단의 확보, 증진, 교육 ‧ 문화의 창달, 사회복지 보장 등, 모든 내정 활동이 국제관계와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영위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교통 ‧ 통신이 빠른 속도로 발달되고 있는 오늘날, 고립 속에서는 살 수 없으며 고립은 곧 낙후, 퇴보, 쇠망을 의미하게 된다.
국가안보를 다루는 정치군사외교, 경제통상외교, 문화외교, 스포츠외교, 기타 각종 전문분야에 걸쳐 조직되고 운영되고 있는 정부 간 및 비정부 간 국제기구와 단체들의 상호교류와 접촉은 넓은 의미의 외교에 포함되는 것이다. 환언하면, 국내활동의 모든 분야가 대외적 ‧ 국제적 관련을 갖게 되며, 내정과 외교가 통합되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내정은 다스리는 자(治者:치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被治者:피치자) 사이의 수직적(垂直的) 관계이나, 외교는 대등한 자 사이의 관계, 즉 횡적(橫的)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힘 또는 영향력의 차이로 현실에서는 완전한 대등관계가 아니라 더 복잡한 관계가 국가 간에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외교는 본질적으로 이해(利害)의 절충과 타협의 작업이다. 따라서 외교에서는 현명하고 적절타당한 정책과 훌륭하고 유능한 교섭능력이 요청된다. 특히 국가의 위난(危難) 시기에서는 외교 역량의 우열이 국가민족의 흥망에 직결되게 된다.
외교와 내정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정이 외교의 기본 바탕이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릇 외교는 국력의 대외적 투사(投射)이므로 국력이 본래 미약하다든가, 또는 일시적이나마 국내 혼란과 국가의사의 분열로 약화되어 있다든가, 심한 경우 파당과 내란으로 확고한 주체 능력을 상실한 때에는 외교가 설 땅이 없어지고 나라의 일은 망쳐지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내정과 외교의 관계를 실제 역사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9세기 후반의 태국(Thailand) 역사는 하나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인도지나⌟에 자리 잡은 프랑스의 압박과 ⌜말레이⌟와 ⌜미얀마⌟로부터 가해 오는 영국의 압력 사이에 끼어 태국(당시 Siam)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 영 ‧ 불 양국 간의 이 지역에서의 세력 균형으로 1896년 영불협약(Anglo-French Convention)이 체결된 것을 기회로 내정 개혁에 힘써 통상 증진, 복지 향상, 국내 정치안정이 이룩되자, 이를 배경으로 1903~1904년에 프랑스와 국경 조정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1909년에는 1855년 이래 영국에서 양여한 치외법권에 관한 조약을 수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태국민이 왕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국권 보호에 매진하였으며, 당파 간 싸움으로 외세와 결탁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따위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시대의 대한제국은 어떠하였던가. 대원군은 국제정세와 역사의 방향에 암매하여 쇄국정책을 강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며느리와의 권력 다툼에 여념이 없었으며, 위정자들은 그들대로 당파싸움과 자기 개인의 이익과 영달에 눈이 어두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안중에 없었으니, 이렇게 하고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기를 바랄 수 있으랴. 결국 일본이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러시아의 세력을 쫓아내고 지배권을 확립하였는데, 대한제국은 이들이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싸우는 것도 모르는 채 방관자로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자기 나라를 전쟁터로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 통분한 역사는 우리에게 심각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즉, 외교에서는 전 국민이 뜻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나라와 민족의 이익만을 생각하여야 하지, 결코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이나 인기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정이 어지럽고 힘이 약해지면 비록 초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외교에서 성공을 거두기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페르시아만 전쟁 말기에 ⌜사담 후세인⌟과 타협에 의한 종전을 모색하다가 실패한 일과,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 지도자로서 일본을 방문, 새로운 관계의 시작과 막대한 경제 원조 획득을 기대하였으나 무위로 돌아간 일 등은, 내정과 국내 사정이 좋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외교수완도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다.
즉, 고르바초프는 국내의 정치, 경제, 민족 문제 등으로 강한 결단력과 통솔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 하에서 일본이 요구하는 소위 북방 4개 도서의 반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며, 일본의 가이후 수상도 북방영토의 반환을 절대적인 과제로 여기는 일본의 여론 속에서 이 문제를 제쳐놓고 경제협력 문제를 다룰 수 없는 처지에 있었으니, 소 ‧ 일 양국 관계의 급속한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련 경제의 파탄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은 페르시아만 전쟁에서 최신무기 및 과감한 결단력을 발휘하여 대 이라크 전쟁을 단시일 내에 승리로 이끌어 전 세계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하여, 앞으로 세계는 미국이 이끄는 단극지도체제(單極指導體制)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논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 이래, 수천억 불에 달하는 국제수지 적자와 재정 적자를 안고 있으며, 그 보충을 외국자금에 의존하는 경제 사정 하에서, 미국의 국력이 과연 단극체제를 감당하기에 충분할 것인가,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안에서 부족한 자가 밖에서 과대한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가 통치의 기능 중, 전쟁과 외교는 상대방과 맞서서 두는 게임(Game)과 같아서, 소위 병법(兵法)이론이 잘 적용되는 노름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의하면, 전쟁에는 인화(人和)가 첫째요, 다음은 지리(地利)이며, 그 다음이 천시(天時)라 하였다. 나라의 흥망이 걸려 있는 싸움에 그 나라 사람들의 인화단결이 없다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한 망해서 싸다고 할 것이다. 다음은 그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 지리적 조건 여하이다. 이에 따라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제반 여건이 결정되고 운명지어진다. 친구와 적이 누구이며 국제적 위상(位相)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대체로 결정된다.
셋째로, 천시(天時)이다. 천시는 기상(氣象)으로서 날씨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기상은 물론, 모든 가변적(可變的( 현상 및 시간적 요건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환언하면, 어떤 일의 적기성(適機性)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모든 조건은 좋다 하더라도 시기(時機)에 적합하지 못하면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는 말이다. 모든 일에는 적합한 때가 있는 것으로, 때를 놓치든가, 또는 때가 아직 안 되었는데도 마음이 조급하여 서두르면 실패하기 마련이며,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버스가 떠난 후에 손을 흔든다든가, 술이 채 익기도 전에 마시려 든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범사에 때를 맞추어 행하라. 이것은 외교와 내정을 막론하고 지켜야 할 금언(金言)이다.
이상 외교와 내정은 국리민복이라는 같은 목적을 위하여 발동되고 행사되는 통치행위이며, 일응 구별되고 대조되면서도 상호 밀접히 연관되고 보완되는 기능임을 설명하였다. 지구가 좁아지고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로 급속히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국제사회의 주역으로서 주권적 권력을 행사해 오던 국민국가(Nation State)가 안팎으로 변화하고 제약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다원화, 복잡화에 따라서 외교와 내정은 엄격히 구별ㄹ되는 개념이 아닌, 종합됨으로써 최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통치의 두 구성 요소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사고와 인식이 요청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