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일중 어린 나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곡괭이질과 똥장군을 지어 농작물에 분뇨를 주는 일이고, 내가 가장 싫어했던 일은 담배벌레 잡는 일이었다.
농약이 없던 때라 담배벌레를 손으로 잡아 포살(捕殺)해야 했다. 담배벌레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해가 뜨기 전 아침 일찍 밭에 나가서 잡아야 한다. 잠이 많은 어린 것이 새벽에 일어나 찬이슬에 젖으며 벌레를 잡는 일은 죽기보다 싫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화학비료가 없었기에 풀을 베어 썩혀서 퇴비를 마련해야 했다. 오늘날의 무공해 유기농업인 셈이다. 퇴비를 많이 마련하기 위해서는 지게 발채에 수북이 풀을 베어 날라야 했다.
나는 성장기에 지게를 너무 많이 지어 양어깨가 안으로 굽어 있다. 양복을 맞출 때면 굽은 어깨가 확연히 드러난다. 풀을 벨 때 낫이 나무 등걸이나 튀어나온 돌에 부딪히면 낫이 튀어 왼손을 내려 찍어 베이게 된다. 그러면 쑥을 짓찧어 상처에 바르고 칡덩굴의 껍질을 벗겨 붕대 삼아 묶는다. 나의 왼손은 수없이 많이 낫에 찍혀서 지금도 그 상처가 보인다.
나와 작은 형은 송아지를 얻어 길러 성장하면 팔아 이익을 반분하는 배냇소를 먹였다. 그러려면 소가 잘 먹는 꼴을 베어야 하고 겨울에는 쇠죽을 쑤어 사육해야 한다. 이 쇠죽은 쑨 걸쭉한 물로 우리는 발의 때를 밀었다. 따로 물을 끓이려면 그만큼 땔나무가 필요하기에 절약하는 것이다. 겨우내 머리를 감지 못하며 머리에 덕지덕지 때가 생긴다. 해동해야 그 때를 벗길 수 있다. 겨울동안은 목욕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여름 내내 맨발로 다니면 발바닥에 군살이 박혀 웬만한 돌이나 가시를 밞아도 아픔을 모른다. 이 군살을 자주 낫이나 돌로 제거하지 않으면 군살이 갈라져 몹시 아프다. 참으로 나는 한국형 부시맨이었다.
모내기를 할 때면 거미리가 많아 발에 주렁주렁 매달려 피를 빨아먹었다. 모를 심으면 애벌김, 이듬김, 맏물김을 맨 후, 벼 사이에 자라는 잡초인 피를 뽑아야 한다. 벼를 베어 말린 후는 볏단으로 묶어 탈곡을 해야 하고, 벼의 낟알을 말려 도정작업을 해야 쌀이 된다.
여름에 추수하는 보리는 까끄라기가 많고, 보릿단을 댓돌에 메치어 알곡을 떨어내야 하는데, 땀에 범벅이 된 몸에 이 꺼끄라기가 묻으면 몹시 따갑다. 그 후 털리지 않는 낟알은 도리깨로 때려 다시 알곡을 떨어내야 한다.
나는 어려서 농사를 몸소 지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농사에 대한 어휘사전이 없다. 더욱이 현재의 농사는 기계화되어 재래식 농법과 농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퇴임을 앞두고 농사 전반에 대한 어휘체계를 수립하여 사어화(死語化)되는 농사어휘를 낱말밭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퇴임 후 5년간 불철주야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장장 500쪽에 이르는 5권의 분량을 탈고하였다. 여기에는 농사짓는 내용이 3권이고, 가축, 양잠, 양봉을 하나로 묶고, 삼림업과 과수업을 하나로 묶었다. 이 5권의 책은 한국농사어휘사전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여름밤 공부를 방해하는 모기
우리 마을에는 1955년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옥천에 가서 사온 석유를 넣은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가을에는 방에서 하니까 그런대로 할만 하나 호롱불이 끄름으로 콧구멍이 새카맣게 된다. 어머니는 등유없이 두려워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만류하셨다.
그런데 여름에도 모기 등의 곤충과 전쟁을 하면서 마루에서 공부하게 된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화로에 모깃불을 피워 마루 근처에 놓으나 효험이 없다. 책과 학습장에 온갖 벌레가 다 모여 기어 다니므로 책을 읽기가 어렵다.
때로는 나방, 풍뎅이. 땅벌레 등 큰 벌레가 날아들어 호롱불을 꺼버리기도 한다. 성냥도 귀하던 때에 호롱불을 끄는 벌레가 야속했다. 삼복더위에 벌레들과 싸우며 공부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호롱불을 켜놓으면 벌레들의 천국이 된다. 이름 모를 온갖 벌레들이 책장과 학습장에 기어 다녀 글씨의 식별이 어렵고 필기를 할 수가 없었다.
이웃마을인 수북리에서는 전기가 들어왔다. 그래서 육촌동생 응민이네 집으로 가서 공부를 하였다. 동생이지만 내가 학교를 늦게 들어가 동학년이었다. 당숙은 공부 잘하는 내가 함께 공부하므로 대환영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려면 칠흑같은 어둠으로 길을 더듬어 와야 했다.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한 이웃마을에 선생님이 계셨다. 그 선생님은 인근마을 청년들의 간청으로 야학을 열었다. 나는 취학 전에 그 야학에서 한글을 배웠다. 야학이 끝나면 어른들은 우리 꼬마들에게 씨름을 시켰다. 점점 나이가 많은 순서까지 올라가면 방의 벽이 뚫리기도 하여 선생님께 걱정을 끼쳐드렸다. 그러면 어른들은 여물처럼 짚을 썰어 진흙에 섞고 이겨서 수수대로 엮어 깜쪽 같이 벽을 복원시키었다.
동이초등학교 동기동창
동이초등학교 13회는 1학년 때 2개 반이 입학하였으나 중퇴자가 많아 3학년 때 한 반으로 줄였다. 학교에서 가까운 친구들은 7세에 입학했고, 나는 학교가 6km여서 10세에 들어갔으며, 나보다 더 먼 곳인 조병리의 학생들은 12~14세에 입학하여 나이차가 다양했다.
학교를 중퇴한 친구들과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은 고향에 가서 농사에 종사하고 있고, 대부분 옥천과 대전에서 살고 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나온 친구들은 주로 서울에 산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그런대로 출세한 셈이다. 동창생 중 문석, 석순, 연종, 홍재, 희우, 관택, 관우 등이 자주 모였다.
석순이 어머니는 들에 나가면서 우리가 먹을 밥은 소쿠리에 담아 두고 가신다. 우리는 꽁보리밥을 고추장에 비벼 맛있게 먹곤 하였다. 성장해서 결혼한 문식이네 집이 모임의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