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 공군기지에서 사령관에게 면회를 요청하니 대령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우리들의 희망을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다음날 알라바마주로 가는 환자 수송용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동부로 가는 군용기를 이용하라고 알려주었다.
예정대로 알라바마에 도착하니 곧 뉴욕 가까운 곳에 있는 비행장으로 가는 항공편이 있어서 쉽게 갈아 탈수가 있었다.
스프링 힐드라는 동북부의 도시에서 기차 편으로 도착했는데, 문제는 숙소였다. 예약이 되어 있을 리 없었지만 텍사스의 친구들로부터 YMCA호텔이 가장 싸고 깨끗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34번가에 있는 그 호텔에 찾아가 투숙할 수 있었다.
한국동란 중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년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군인에 대한 인기가 괜찮아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가 있었다. 요즈음에는 YMCA, 호텔에 드는 사람이 드물지만, 그 당시에는 한국의 현직 보건장관도 1일 5달러 이하의 그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으니 그 당시 우리나라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극장표도 거저 얻을 수 있고 해서 뉴욕시 구경을 잘 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 3일간 있다가 워싱턴에 가서도 관광을 했지만 돌아갈 일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워싱턴 시내 가까이에 있던 내셔널비행장을 공군에서도 일부 사용하고 있기에 거기에 가서 탑승안내 책임자 같아 보이는 흑인 상사에게 샌안토니에 가야 한다고 했더니 여행증명서 사본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여행증명서를 자세히 읽으면 워싱턴-샌안토니오 간 비행이 포함되어 있을 리가 없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울과 샌안토니오간 왕복명령서 사본을 제출했는데, 읽어보지도 않고 “오케이”하면서 소형비행기에 타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타고 보니 이 비행기는 훈련용으로 조종사와 훈련생이 모두 낙하산을 착용하고 있었고, 우리들에게도 낙하산을 착용하도록 하는 등 안전성에 있어서 좀 미심쩍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무사히 샌안토니오에 도착한 후 역에 가서 로스엔젤레스행 열차를 타고 그곳에서 며칠 간 있다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정해진 시일 내에 일본의 동경에 도착했다. 미국에서는 참으로 좋은 경험을 했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으며, 전쟁터에서 쌓였던 피로도 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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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의 YMCA호텔 / 미국 의료견습 시 싸고 깨끗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이곳에 투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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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다치카와의 미군기지에 도착했더니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미군장교들의 태도가 냉랭했다. 자기들끼리 하는 대화 중에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가 들려서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았더니 이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을 석방했기 때문에 휴전이 깨질 것이라는 것과, 그 결과 자기들만 희생하게 되었다고 생각되어 우리들에게 냉랭한 시선을 보냈던 것이다.
그대로 영내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유쾌하지 않아 외출허가를 받아서 동경 시내로 나갔다, 동경시내에 있는 조그마한 여관에 들게 되었는데 일본사람들은 우리들을 미국에서 온 2세 장교로 생각했는지 지나칠 정도로 친절을 베풀었다. 한국에 가는 적당한 교통수단을 기다리면서 수일간 동경시내를 구경하다가 군용열차편으로 규슈[]의 사세보항에 도착, 선편으로 현해탄을 건너 부산항에 도착했다.
춘천에 있던 신경외과반에 복귀하여 인접하여 있는 미군야전병원 군의관들과도 친하게 지내면서 전쟁이 끝나면 유학을 가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미국의 의학을 공부하여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미국 군의관 가운데 토마스 제퍼슨 대학 출신이 있어서 그 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사람의 소개장과 함께 유학신청서를 내었더니 선뜻 받아들여졌다.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병원 신경외과에서도 다음해에는 유학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으나, 마침 군에서 휴직하고 미국에 갈수 있는 길이 열렸기에 되도록이면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1954년 7월부터 제퍼슨 대학병원에 가기로 결심을 했다.
비록 휴전이 임박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의학발전을 위해 군의관들에게 휴직 후 도미유학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군의 최고지도자들의 국가의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토마스 제퍼슨 대학병원 수련의 근무
나의 유학생활은 필라델피아 시의 10번가와 샘슨가 사이에 있는 제퍼슨 의과대학 병원에서 1954년 7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나름대로 깊은 뜻을 가슴 가득히 품고 있었기에, 참아낼 수 있었다.
병원에 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그 당시 신경외과 과장이었던 예가(Rudolph Jaeger) 박사였다. 그는 곧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인턴에게 병원을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예가 박사는 독일 계통의 미국인으로서 단단하고 작은 체구에다가 엄하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오래 사귀어보면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가진 짐이라고는 작은 옷가방 하나가 고작이었으며 피난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은 집안형편에서 어렵게 마련한 800불이 전 재산이었다. 당직실은 2층이었으며 침대가 6개 있는 작은 방이었는데, 군대의 천막 숙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극히 간소한 방으로, 바로 옆방이 연구용 동물사육실이어서 이상한 냄새가 많이 났다.
숙소 때문에 다소 실망은 했지만, 병원에서 지급한 가운으로 갈아입고 병실로 내려갔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외국인 수련의는 드물어서 인턴, 간호사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예가 박사 밑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다는 소문 때문에 그랬는지 안쓰럽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신경외과 조교수였던 화이트리(Whiteley) 박사와 함께 병실을 돌아보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설명 들었다. 그런데 나의 군의관 시절 경력을 보고 상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지 첫날부터 당직을 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의 경험은 외상 환자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직실로 돌아오니 다른 과의 당직의사들이 나에게 전화기와 가장 가까운 침대에서 자라고 했다. 신경외과에 응급환자가 자주 생겨서 밤새도록 시달린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병실에서 걸려오는 전화의 3분의 2는 신경외과 환자에 관한 것이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전화로는 적절한 지시가 어려울 것 같아. 전화를 받으면 병실로 뛰어 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환자들 중에는 멕시칸, 흑인, 유럽인 등 이민 온 사람들이 있어서 영어 액센트도 가지가지여서 알아듣기가 쉽지가 않았다. 나는 다른 수련의들의 협조를 받아가면서 큰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해나갔다. 당시 만 27세의 젊은 나이에 전쟁 일선에서 단련된 체력과, 무엇인가 배워야겠다는 굳은 결의로 힘든 나날이었지만 열심히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