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고등학교 (16회)
  제2장 중고등학교 시절

인현시장 풀떡빵 아저씨
 
인현시장 길 한복판에 풀떡빵을 파는 아저씨가 계셨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사카린(설턍대용)과 팥을 넣어 붕어빵처럼 구워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저녁식사이다. 

궂은 날이나 추운 겨울에는 장사가 잘 안되어 그 아저씨도 일찍 귀가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저녁을 그것으로 때우기 때문에 갈수가 없어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더없이 고마운 분이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기다리는 아저씨를 생각하여 야간수업이 끝나자마자 단숨에 뛰어간다. 아저씨는 가지도 못하고 덜덜 떨며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나에게 미리 준비해둔 빵 봉지를 준다. 10환을 내면 팔다 남은 빵을 모두 주고 서둘러 가신다. 이 날은 내 생일인 셈이다. 모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풀떡빵 아저씨의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한다. 그 분을 지금 찾을 수만 있다면 받은 은혜의 백배 천배로 갚고 싶다. 고마운 아저씨 지금도 살아 계실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미아리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 아래에 사는 친구의 오막살이에 잠시 기거한 일이 있었다. 을지로 2가 학교에서 을지로 4가까지 걸어가서 전차를 탄다. 나는 책가방을 친구에게 맡기고 돈암동 종점까지 뛰어간다. 

그때는 서울거리가 한가하여 도로와 인도로 뛰기가 용이했다. 종로4가, 서울대병원, 혜화동, 삼선교를 거쳐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 뛰어가 친구가 타고 오는 전차를 기다린다. 오늘날 지하철과 달리 도로 위로 달리던 전차는 무척 느렸다. 전차 종점에서 미아리 고개를 걸어서 넘는다. 

또 거처할 곳이 없다. 같은 반 친구 이신창이 원효로 달동네의 천막집에 살았다. 동학년인 정우균(대서소 심부름꾼)과 함께 제재소에 가서 통나무를 켜낸 나무조각을 구입하여 기둥을 세우고 나무조각에 못을 박고 그 위에 은박지를 깐 다음 신문지로 도배를 하였다. 

방 안이 온기라고는 내 체온뿐이다. 방이 내 체온의 덕을 보는 셈이다. 멸치 통조림이 얼어 녹여서 먹어야 했고, 잉크가 얼어서 글씨를 쓸 수가 없다. 당시에는 볼펜도 없었다. 천막집 헛간으로 쓰는 곳을 거처로 삼았으니 겨울에는 살을 베이듯이 몹시 추웠다. 잘 때는 옷을 더 껴입고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잤다. 

이 달동네는 수돗물이 없어, 저 아래 공동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한다. 두레박으로 깊은 샘의 물을 퍼서 물통에 담고 물지게로 지고 올라오려면 숨이 턱턱 막힌다. 물지게는 물통의 물리 출렁거리기 시작하면 그 반동에 의 하여 더 흔들린다. 

물지게를 지는 기술에는 고도의 요령이 필요하다. 지게라면 나에게는 퍽 친근한 존재이니 나는 물을 흘리지 않고 잘 긷는다. 때로 우균이가 물을 길어오면 반통만 남아있고, 바지는 모두 젖었다. 그러니 물 긷는 것은 자연 내 몫이 되었다. 

아침에 밥을 지어 멸치통조림을 한가지로 식사를 한 후 냄비를 수건에 싸서 이불 속에 넣고 일터로 향한다. 그대로 방에 두면 얼어서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50년대말 서울시내를 누비던 전차 [출처 ; 서울시]

우리는 을지로 2가 학교에서 원효로 달동네까지 걸어서 다녔다. 서울역, 염천교, 청파동, 효창동, 원효로를 거쳐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을 걸어 천막 자취집에 오른다. 누군가가 돈이 생겨 빵집에 가면 빨리 먹는 사람이 장땡이다. 신창이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빠르게 먹어 치워 남보다 많이 먹는다. 

남산고등학교

나는 그 후 영락교회 고(高) 장로님의 알선으로 삼선교에 있는 약국 점원이 되어 숙식이 해결되었고, 용돈과 학비의 걱정도 없게 되었다. 주인은 서울구등학교를 거쳐 육사에 입교하였다가 당뇨로 퇴교당한 분이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초였다. 영락성경구락부는 정부의 인허가가 없는 학교이므로 고등학교 졸업이 인정되지 않는다. 나는 학비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육군사관학교를 가려고 결심했다. 문교부에서 학력을 인정해주는 정규 고등학교 절업장이 필요했다. 아니면 대학입시 검정고시를 치러야 한다. 

돈암동 전차종점역 성신대학교 입구에 독립운동가이신 이강 선생님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내가 몸담고 있는 약국에서 가깝고 야간이 있어 그 학교를 찾아갔다. 교감선생님은 “그놈, 똑똑하게 생겼는걸. 내일부터 학교에 와라.” 

담임이신 한도필 선생님의 전학절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왔다. 이 학교는 재정난으로 나를 졸업시키는 것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그래서 우리 졸업생들은 졸업증명서를 떼려면 서울시 교육구청에 가야한다. 사람들은 남산고등학교 하면 남산에 있었던 협성고등학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산고등학교에 가니 반에서 주먹께나 쓴다는 학생들이 와서 “전학을 오면 신고식을 해야 하는데, 너는 봐주겠다.”고 말했다. 신고식이라는 때려주고 얼차려를 주면 전학온 학생이 빵을 사는 것이란다. 나는 키가 작고 귀여워서 다행히 신고식을 면했나보다. 그들의 은혜가 하해와 같다고나 할까......

고등학교에는 무서운 규율부가 있었다. 팔에 완장을 차고 교문에 서서 북장검사, 지각생의 단속 등 모든 질서를 잡는 무서운 학생들이다. 교문에 떡 버티고 서서 경례를 받으며 거드름을 피운다. 규율부에 잘못 보이면 이층에 끌려가 뭇매를 맞아야 한다. 그리고 학생간부들고 권력이 대단했다. 야간학교에는 어디나 불량배가 있어 이들이 주먹으로 지배한다. 

한번은 전교생을 모아놓고 규율부장의 일장훈시가 있었다. 3학년 동급생이 잘못했다고 전교생 앞에서 규율부가 마구 때렸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아무리 잘못이 있더라도 후배들 앞에서 동급생을 때릴 수 없습니다.”라고 항의했다. 규율부장은 
“이 거지 발싸개 같은 놈. 앉아, 임마!”한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까 등교할 때 모자가 삐뚜러졌다고 시비하던 규율부를 교문으로 찾아갔다. 

“임마, 너희들은 뭘 잘한다고 동급생을 구타해. 짜식들!”
나의 주특기인 주먹이 날랐다. 한방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교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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