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 장사
나는 남대문 도매시장에 가서 원가가 30환인 자그마한 세수비누(LUX)가 500장이 든 한 궤짝을 샀다. 비누는 몹시 무거웠다.
점퍼를 벗어 어깨에 대어 메고 서울역까지 갔다. 어깨가 잠바에 피가 흠뻑 베었다. 역내 노무역을 하는 아저씨를 찾아가 6시발 부산행 완행열차에 실어놓도록 부탁했다. 이튿날 새벽 물건을 실어 내리는 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울역 구내로 들어갔다.
나는 무임승차를 하는 사정을 기차에 오르기 전에 승무원에게 미리 말했다. 승무원이 검표를 할 때 나는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였다. 그 승무원은 말없이 어깨를 눌러 앉힌다. 무임승차를 용인하는데 대한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말없이 앉힌 것이다.
요새도 이렇게 인자한 승무원이 계실까? 아니 요새는 나같이 무임승차하는 학생이 없을 것이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부산행 완행열차를 화부가 석탄을 퍼부어 때서 증기로 운행할 때이니, 서울에서 옥천까지 6시간이 걸렸다. 아마 부산까지는 13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옥쳔역에서 내려서 승객이 다 출발한 후 나는 역무원에게 무임승차하였음을 말하고 역을 무사히 빠져 나온다.
영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도 늘 무임승차를 하며 무임승차에 이골이 나 있다. 검표원이 오면 뒤로뒤로 가다가 중간역에 내려서는 이미 검표가 끝난 앞으로 간다. 그러나 검표원이 늘 속지는 않았다. 나는 승무원에게 잡혀 이원역에 인계되어 모자와 책가방을 압수당했다. 집에 가서 차비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이원에서 집까지는 11km는 될 것이다. 마침 식목일이라 전화 받는 역원만 남겨두고 모든 역원들이 구내에 식목을 하러 나갔다. 나는 책가방을 들고 모자를 쓴 후 “아저씨! 가겠습니다. 돈 많이 벌어 갚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거수경례를 하고 줄행랑을 쳤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나는 철도청에 빚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다가 요새는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노약자석에 편히 왕래하니 나는 철도청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보은행 버스는 옥천 구읍을 거쳐 수북리를 통하여 간다. 지금은 대청댐이 건설되어 새로운 길이 생겼다. 버스도 역시 무임승차다. 고학생이 무슨 특권이나 있는 양 무임승차를 밥먹듯이 했으니....... 그 후 나를 아는 버스기사는 손을 들어도 그냥 지나간다. 분명히 승차거부이나 할 말이 없다.
동이초등학교 13회 긴급동창회 개최
동이초등학교 13회 동창회가 급히 열렸다. 주제는 김응모의 어려움을 돕자는 것이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친구들은 나를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일정표를 짰다. 내가 가는 시각에 그 마을 친구들이 미리 자루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농촌이라 돈이 없을 때는 비누값으로 보리쌀을 받았다. 넉넉한 집은 비누 3장, 현금이 없는 집은 외상으로 주었다. 친구들은 외상으로 준 비누값을 받고, 비누값으로 받은 보리쌀을 장에 내다팔아 현금으로 마련했다.
초등학교 친구인 임홍재의 큰할머니는 보리쌀 두말을 주셨다. 큰돈이다. 그 후에 홍재네 집에 가면 큰할머니를 꼭 찾아뵈었다.
“응, 비누장사 손자가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
친할머니처럼 인자하시다. 나는 일주일만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비누 500장을 다 팔고 다시 대전 도매상에 가서 비누를 사서 팔러 다녔다.
시골은 3일마다 장터가 형성된다. 나는 “고려대학고 국어국문학과 2학년 재학 중인 고학생입니다. 비누 한 장에 100환이니 도와주십시오.”앵무새처럼 되뇌이곤 했다. 그러나 장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학생입니다.”하고는 비누를 던지며 “100환입니다.” 거절하는 성인이 거의 없다. 순박하고 남을 돕는 마음씨가 고맙기만 하다. 30환에 사서 100환에 팔았으니 7할이 남는 장사이다.
이원에 갔을 때이다. 약방 주인은 학생증을 보자고 하여, 학생증을 제시하니 가짜 고학생으로 의심하는 눈치이다. 학과장님이 써주신 소개장 겸 명함을 보였다. 그것을 보고 믿음이 생겼는지 그 분은 다니다가 갈 곳이 없으면 여기 와서 자고 가라고 친절을 베푸신다. 그래서 대접을 잘 받고 이튿날 영동으로 향했다.
잘 먹지도 못하고 긴장과 피로가 겹쳐 편도선이 몹시 부어 3시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다녔다. 삼복더위이나 오한이 몹시 나서 몸이 떨린다. 중학교 은사이시며 병원에 근무하시는 영동의 서병덕 스승님은 치료를 해주시고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데리고 다니며 비누를 많이 팔도록 도와주셨다.
영동에는 중학교 동기들이 많이 있다. 스승님께는 친구집에서 자고 일찍 떠나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나는 친구들의 신세를 지기 싫어, 영동 매천리의 산 위에 지어놓은 영동시내를 굽어볼 수 있는 정자에 올랐다. 여름이니 편안히 잘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편도선이 붓고 신열이 심하다보니 여름이건만 뼈를 깎는 추위였다. 잠을 잘 수가 없다. 이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갈 수도 없어, 밤을 꼬박 새우고, 옥천에 가서 비누를 챙겨 보은으로 향했다.
속리산이 개발되기 전이고, 산천경개가 좋아 보은은 인심이 매우 좋았다. 가는 집마다 거의 비누 한 장씩은 꼭 사주었다. 어떤 여관집에 들렀더니, 인자하게 생긴 여관집 주인 아주머니는 비누 한 장만 내놓으면 저녁 아침밥과 잠을 재우겠다고 한다. 인상 그대로 후덕하신 분이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저녁 때 오겠습니다.”
나는 모처럼 편안히 잘 수 있었다.
이튿날도 가가호호를 방문하다가 우연히 지난 선거에 낙방한 박 후보 집에 들르게 되었다. 일테면 박 후보와 나는 정적(政敵)인 셈이다. 그 분이 입후보하였을 때 나는 신각휴 의원의 찬조강연을 하여 당선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분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민심을 살피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보은 보건소에 들렀더니, 내 편도선염을 본 의사 선생님은
“이런 몸으로 어찌 다닌단 말이오. 그러다가는 정말 생명이 위험합니다.”
정성껏 치료를 해주며 약도 주고 항생제 주사도 놓아주신다.
병원에 필요하다며 비누도 10장이나 사주었다. 팔도강산 인심도 좋을 시고! 지금도 그분들의 고마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