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다시 택시를 잡아서 남산 KBS방송국으로 갔다. KBS 마당에는 경북 차 1호인 이선근 총장의 포드승용차가 정차해 있었다. 박 선배와 내가 총장 자동차 앞으로 걸어가니 운전기사가 나와서 박 선배를 보고 “영감님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그 날 따라 날씨가 조금 흐리고 눈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박 선배는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 앉으면서 나도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약 10분을 앉아 있어도 총장께서 나오지 않아 박 선배는 총장님을 모시고 나오겠다고 하면서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있지 않아서 이 총장과 이갑성 씨가 현관에서 인사를 하고, 박 선배가 이 총장님을 어깨동무 하듯이 모시고 자동차까지 오셨다.
총장님을 자동차에 모시고 박 선배가 그 옆에 앉으면서 나를 운전기사 옆에 앉으라고 말했다. 내가 운전기사 옆에 앉으니 자동차가 출발하자 총장은 “박 군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박 선배는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KBS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간판이 맨 먼저 보이는 다방에 들러 박 선배는 세 사람 분 커피를 시키고 나서 나를 소개했다. “영남대학교 출신이고, 경북대학교에서 석사를 받았으며,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되었으니 영남대학교 교수로 갈 자격이 충분한데 채용해 주십사고 하는 것이 제 부탁입니다.”하고 말했다.
이 총장은 “지금은 이미 새 학기 인사가 다 끝났고, 2학기에 고려해보겠다”고 말씀 하시며 대학강사 경력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강사 경력이 없다고 하니, 총장은 “강사 경력이 없으면 인사위원회나 학과 교수들이 이의를 제기할 텐데 강사경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두 분이 정치문제와 영남대학교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깊이 있게 상의하는 것을 보고 아주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강사 경력에 고민하던 나는 영남대학교 병설 공정 이동영 교수에게 말씀 드려서 12시간의 강의를 배정받았다. 그러나 시간강사료를 받아서는 다섯 식구가 먹고살기가 어렵다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대륜고등학교에 그대로 남아 있느냐, 아니면 시간강사를 해야 하느냐의 고민을 이틀간을 하다가 대륜교등학교에 사표를 제출했다. 대부분 동료교사들은 너무 무모하고 위험한 결정이라고 충고했지만 다음 일은 운명에 맡기고 용단을 내렸다.
영남공전 시간 강사로 나간 한 달 후 쯤 상서여중 이인수 교감선생님이 나에게 와서 선산 장천 오상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을 긴급히 구하는데 장 선생님이 일주일에 3일 반만 나가시면 일반교사와 똑같은 대우를 해드리겠다고 하는데 의향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생각해보겠다고 했더니 이튿날 아침 일찍 이인수 교감선생이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나를 태우고 선산 장천까지 갔다. 장천은 대구에서 70여리가 되는 시골이었다.
학교에 들어가니 교정에 가득한 라일락과 철쭉 향기가 나를 이상향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장 선생은 출장 중이었고 이인수 선생이 오상고등학교 교감선생께 나를 소개했다.
교감 선생은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환영의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들을 직원실로 안내했다. 나는 이 학교에 온다고 아직 확실한 답변을 한 일이 없는데, 교감선생은 나를 부임하는 신임교사라고 교직원들에게 소개하고 학생들의 전체조회에서도 인사하도록 했다.
그래서 나는 1년간 일주일에 이틀 반은 영남공전 강사로, 3일 반은 오상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바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생활에 대한 걱정은 덜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궁즉통(窮則通)’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노영 선배는 내가 대륜고등학교를 그만둔 것에 대한 책임감에서 대구로 내려와서 이선근 총장님을 모셔서 나와 합석하는 조찬을 금호호텔에서 마련했다. 박노영 선배는 “총장님께서 약속하신 후배 장군에게 잘못하면 제가 사기꾼이 될 것 같은데 총장님께서 어떻게 조치하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다그치자 총장은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때가 1972년 10월 초순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11월 하순경 영남대학교 교무처장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이력서와 연구업적으로 제출하라고 해서 제출했더니 인사위원회까지 올라갔으나 당시 이해에 얽힌 학과 교수 한 분이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무렵 나는 성서여고 야간부로 전근했다. 3학년 담임을 맡았으나 상고(商高)이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다. 영남공전의 강의는 여전히 그대로 하고, 아침에는 ECA 외국어 학원 대입반의 단과반과 종합반의 강의를 맡았다. 거기에서는 장덕순이라는 이름으로 강의를 담당했다.
상서여고에는 청구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대학 동기생 황진동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되어 우리의 우정은 서울까지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리고 다음 해에는 영남공전과 ECA 외국어학원, 대구에서 제일 큰 대영학원에서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학원과도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고3 선생과 학원 강사의 길은 대학입시 전문가가 되는 길이었다. 청구고등과 인화여고 고3 담임과 학원에서의 대입강의를 하면서 나는 이미 대입전문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도 나는 김춘수 교수의 권유로 경남대학교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학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기획실장이 거의 다 될 것 같으니 이선근 총장의 추천서를 첨부해달라고 하기에 첨부해주었으나 교수의 초빙 과정 이면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나처럼 순진한 사고로서는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것이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늘날에도 자주 오르내리는 대학의 여러 가지 문제는 그때라고 없지는 않았다라는 사실이 후문으로 전해져왔다.
일단 대일학원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김종윤 선생고 한두 차례 더 만났는데 10월 중순경 김종윤 선생이 인천교대 한인수 교수를 인사시켰다. 당시 한인수 교수는 대일학원에서 나오는 시험지 <아이템플>의 지리문제를 출제하려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왔는데 그때 나와 인사를 한 것이다.
한인수 교수는 인사하자마자 나의 이력에 대해 여러 가지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경북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신춘문예 문학평론에도 당선했으며, 고3 담임과 학원에서 서울대 반도 가르쳤다고 하니, 한인수 교수는 “장 선생님은 학원에 가실 분이 아닌데 왜 학원으로 가시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어 그런다고 하니까 한 교수는 “서울대학교 후배이고, 숙명여고에 같이 근무한 분이 지금 명지여고 교장인데 그저께 고3을 담당한 좋은 교사를 추천해달라고 요청을 받았는데, 명지여고 교장을 한번 만나보지 않겠습니까?” 하며 나의 의향을 물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자, 한인수 교수는 대일학원 승용차를 빌려서 두 사람이 함께 남가좌동에 있는 명지여자고등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아직도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문학평론가로서 활동을 하는 데도 지방에서는 너무 불리하다는 여건들이 서울로의 진출을 생각하게 했다. 내가 오장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소개한 이윤상 선생이 단국대학교의 핵심 보직을 맡은 교수들과 경영진을 잘 안다고 하기에 단국대학교에서 강의시간을 얻는 일을 추진했다. 그리고 학원강사 일도 병행해서 수소문했다.
9월 하순경 석우일로부터 경주중학교 선배이신 김종윤 선생이 서울 대일학원 종합반 국어과 주임으로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석우일과 함께 김종윤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이력서를 제출하면서 몇차례 만난 후 1974년 10월 초 다음해 2월부터 대일학원 강사로 근무하기로 약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