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해룡이가 집에 놀러왔다. 탁구를 치다가 손가락을 탁구대에 부딪혀 통증을 느낀다고 말한다. 잘못하면 병신이 될 것이니 X레이를 찍어보라고 했다. 찍어보니 손가락 뼈에 금이 가서 깁스(Gips)를 하고 오른팔을 붕대로 묶어 목의 끈에 매고 왔다.
“우리 탁구치러 갈까?”
“병신이 어떻게 탁구를 쳐.”
“왼손으로 쳐도 너는 이긴다.”
친구가 스포츠에 만능이긴 하지만 나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결과는 가까스로 내가 이겼다. ‘...... 역시 잘 치는군......’ 마음속으로 감탄하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 아들 유진이와 함께 삼청공원에 가서 축구를 하였다. 그 좁은 공간에서 공을 요리조리 드리볼 하니, 유진이는 공을 뺏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와! 해룡이 아저씨 정말 축구 잘 하신다.”
유진이는 공원에서 축구하던 해룡이 아저씨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들만 둘인 친구는 내 딸 유라를 딸처럼 생각한다.
“아빠! 해룡이 아저씨만 만나면 행복해.”
유라의 미술전시회 때마다 와서 격려하고 금일봉을 내놓으며 꼭 밥까지 사준다.
나는 1989년 어렵게 공부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마치 자기가 학위를 받는 양 좋아한다.
“와! 축하해! 내가 무슨 선물을 할까?”
“그래? 비싼데, 박사가운이 필요한데......”
“좋아.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해줄 거야.”
후암동 성의사(聖依社)에 같이 갔다. 박사가운의 모양새는 대학마다 약간씩 다르다. 특수한 복장에다가 품질이 고급이라 비싸고 몸에 마젝 맞추게 된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김응모입니다. 이 친구가 맞춰주는 건데요.”
성의사 주인은 놀라며 “그러세요. 선생님 성함은?”
내 박사가운에는 ‘김해룡 기증’이라고 새겨있다.
그 많은 돈을 쓰고도 싱글벙글 좋아한다.
“김 선생!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도 즐거워?”
“즐겁다마다. 박사 친구를 두었는데.”
내가 사귄 친구 중에는 경상도 사나이는 이 친구가 처음이다. 나는 경상도 사나이는 이 친구처럼 모두 의리 있고, 사내다운 줄 알고, 경상도 사람이면 무조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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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예술의 전당 회갑기념 봉정식장을 찾은 친구들 / 왼쪽부터 김해룡 부인, 박명훈, 오홍경, 홍성택, 김해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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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제대 후 고등학교 교편을 잡다가 종로학원 강사를 한 후 퇴임하였다. 주중 5일은 테니스 하고, 하루는 등산하고, 일요일 오전에 교회 갔다가 오후에 운동하고 우리집에 온다.
저녁을 먹으며 술 한 잔을 나눈 후 우리는 사업을 시작한다. 우리의 사업은 바둑을 두는 것이다. 이 친구는 내 표현에 따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다. 여러 무임에 참석하랴, 아들 사업 돌보랴, 어려운 친구들을 방문하랴, 운동하랴, 등산하랴, 교회에 봉사하랴........
친구는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좋아하여 집사람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에 안 오면 ‘...... 육시랄, 뭔 일이 있어 안와.......’ 나는 혼자 중얼거린다. 내가 몹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집사람도 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다. “이런 날이면 테니스도 못 할 텐데. 김 선 생님이 왜 안 오실까?” 친구를 기다리는 나를 위로하는 말이다.
1988년 나는 강남대학에 교환교수로 왔다. 1978년 발생했던 담석증이 재발하여 입원하였다. 현대의학에서 담석수술은 맹장수술처럼 간단하다고 한다. 퇴원을 앞둔 날 인턴의 잘못으로 쓸개즙이 창자의 겉에 흘러들어 창자가 녹아 복막염이 되어 다시 배를 가르고 창자를 모두 찢어내고 치료하였다.
그 후 허파에 물이 차서 졸도하였다. 집중치료실(중환자실)로 옮겨 18일간 의식불명이 되었다. 아내는 죽기 전에 와서 보라고 전화기를 들었다. 친구들이 왔다간 것을 나는 전혀 모른다. 친구들이 그 대학병원에 인사과장으로 근무하는 나의 장조카에세 살 가망이 있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옆으로 저었단다.
해룡, 명훈, 한익이는 집에 가서 이리 딍굴 저리 딍굴, 일어났다 누웠다 하며 하늘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연신 눈물을 닦더란다. 친구의 부인들은 ‘....... 아하, 유라 아빠가 살아나기가 어렵구나.....’를 직감하였다고 그때의 소감을 전한다.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친구들이 있어 나는 행복한 늙은이다.
나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부부동반으로 위의 세 친구들을 초대했다. 친구 부부들은
“다시는 그렇게 놀라게 하지 마세요.”
“미안, 미안, 다시는 놀라게 하지 않을 테니 여러분도 놀라게 하는 일이 없게 하세요.”
우리는 오랜만에 파안대소하며 서로의 건강을 빌었다.
친구는 정년퇴임 후 부산에도 자주 왔다. 내가 수업 중이면 아내가 부산의 해운대, 태종대, 이기대, 신선대, 물운대, 오륜대, 용궁사, 송정 등 부산의 명승지를 두루 관광을 시킨다. 밤에는 부산에 있는 유일한 대학동기동창인 한동수 교장과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나의 제자들과 합석하기도 한다. 내 제자들은 자기 제자처럼 아끼고, 내 제자들도 김 선생은 스승처럼 모신다.
내 제자들이 대개 서울로 세배를 왔다. 친구는 백일을 제쳐놓고 달려온다. 친구의 식사대접을 받은 후 노래방에 가서 광란의 밤을 즐긴다. 한번은 제자들이 서울에 오던 날 마침 눈이 왔다. 부산에서 눈이 보기가 어려운 제자들은 환성을 지른다. 광교산 뒷자락인 뒷산에 오르니 눈꽃이 나무마다 만개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손에 손잡고 깔깔거리며 오른다. ‘무릉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송강의 관동별곡이 나오는가 하면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는 한시가 나오기도 한다. 국문과 출신들이라 제법들 읊조린다.
경주에 계신 나의 스승님에게도 문안전화를 잘 드린다. 경주 스승님은 제자를 하나 더 얻었다고 기뻐하신다. 경주 스승님은 70이 훨씬 넘으셨으나 테니스를 즐기신다. 김 선생님이 테니스축제를 열자고 하여 지난 가을에 제자들이 경주에서 대거 참석한 가운데 테니스축제를 얼었다. 올해는 친구가 사정이 있어 테니스축제가 무산되었다. 그랬더니 나보다 제자들이 더 섭섭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