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자들은 “교수님 주위의 분들은 모두가 훌륭한 분들이어요.”라고 말한다.
한번은 맥주를 한 상자 들고 왔다. 내가 맥주보다 소주를 즐기는 것을 알면서도 맥주를 사온 것이다.
“나는 맥주는 안 마시는데........”
“혜진이 엄마(나의 며느리)가 마시잖아.”
며느리는 “친구의 며느리에게 맥주까지 사주시다니.”라며 몹시 감격해한다. 내 손녀들도 해룡이 할아버지를 무척 따르고 좋아한다.
둘째 손녀 혜원이는 할아버지가 바둑을 두고 있으면 내 무릎에 앉는다. 친구가 생각하느라고 바둑을 두지 않고 있다. 친구를 뻔히 쳐다보며
“할아버지 고민 중!”
“응, 고민 중.”
재치 있는 말에 두 할아버지는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친구의 장남 철웅이는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한국 굴지의 근무하며 컴퓨터에 만능인 처녀와 결혼했다. 유빈(친구의 맏손녀)이 엄마는 학부 2학년 때 그 학교 교수님들이 “너는 가르칠 게 없다.”고 말하여, 다른 대학에 편입학하여 컴퓨터의 공부에 만능이어서 두개 학교의 졸업장을 받은 컴퓨터의 천재이면서 두 딸을 두었다.
이 친구도 나처럼 딸만 둘을 두어 <딸딸이>할아버지가 되어 유빈의 재롱에 푹 빠져있다. 철웅이는 수천 대 일에 해당하는 경쟁률을 뚫고 LG그룹에 특별히 발탁되어 근무하고, 며느리는 회사의 주문을 받아 집에서 컴퓨터 디자인 일을 하고 있어 친구의 부부는 손녀를 돌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바둑을 두면서 바둑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부부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 자식들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친구를 자주 만날 수 있어 나는 행복하다.
불알친구 오한익
나의 절친한 불알친구 한익은 금암리에서 태어난 빈농의 아들이다. 어디를 가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조용하고 착실한 친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돈벌이를 위해 고향을 떠났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을지로 4가 작은 구둣방에서 손으로 만드는 수제화직공(手製化職工)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입주교사에서 해고되면 숙직할 곳이 없어서, 친구가 가게 문을 닫을 때에 찾아간다. 친구는 작은 가게의 손님들이 앉는 좁은 자리에서 자고 매식(買食)을 한다.
내가 가면 두 사람이 잘 곳이 없다. 우리는 동그란 나무 의자를 나란히 놓고 그 위에 긴 판때기를 깔고 겨우 몸을 의지하여 잔다. 잠결에 떨어지면 다시 잠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아침에 이웃에서 물을 얻어다가 세수를 하고 친구가 사주는 밥을 먹고 나는 고려대로 간다.
그 후 친구가 미아리 길음시장에서 독립하여 가방가게를 할 때다. 나의 대학동기인 명훈이도 근처에 살았다. 나로 인해 친구가 되었지만 서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8남매의 장남인 명훈이는 학비마련 외에 집안 살림도 도와야 했다. 한익이는 때때로 쌀을 사가지고 명훈이네 집도 방문한다.
내가 친구의 가게에 들르면
“김 선생, 저 술집에 가서 마시고 있어. 가게 문 닫고 득달같이 달려갈게.”
가게 문을 닫고 와서 함께 술을 마신다.
옆집 옷가게에서 가죽점퍼를 맞춰주어 폼나게 입고 다녔다. 이 점퍼는 대를 물려 유라가 미국 유학 때 입고 다녔다. 우리 부부는 자주 왕래하며, 매년 친구의 부부와 망년회를 가졌다. 이것이 확대되어 나의 대학동기들이 합류하였다.
친구는 형제자매 조카들까지 돕느라고 치부할 새가 없다. 어쩌면 그렇게 나와 해룡이 환경과 같을까. 아들 하나를 공부시키며 홀로 사는 누나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가게를 내어주었더니, 이익의 배분은커녕 아예 가게를 통째로 달랜다. 형에게도 가게를 내어주니 이 분은 한술 더 떠 행패까지 부린다.
옆에서 보기에도 딱하다. 착한 친구는 결국 가게를 모두 형제자매에게 주고 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현제 중 누가 잘 살면 평준화 하려 한다 불알 두 쪽만 가지고 피나는 노력으로 번 돈인데, 왜 평준화 하려할까? 형제자매와 조카들은 평생 동안 친구를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괴롭힌다. 가난은 나라도 못 막는다는데, 어찌 막내동생이 막으랴?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에 기쁨을 주기는커녕, 자라기도 전에 가지를 다 잘라가거나 원목마저 상하게 하니 그 나무가 자랄 수 있겠는가. 그 나무가 다 자라면 그 그늘에서 모두들 쉬어갈 수 있을 텐데 안타깝다.
남자 천사가 있다면 이런 친구를 일컬으리라. 수호천사란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친구는 내향형 요조숙녀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고 단란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누가 뜻하였으랴, 친구의 부인이 간암에 걸린 것이다. 좋다는 병원을 다 찾았으나 차도가 없다. 친구는 좋다는 약을 구하려고 강원도의 험난한 산을 뒤지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옆에서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부인이 투병중일 때 친구는 직업을 바꾸어 가방 원단을 재단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기계를 잘못 다루어 두 손가락이 잘리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잘린 두 손가락을 가지고 국립의료원에 가서 몇 차례의 수술을 받아 원상태로 복원하였다.
손가락 수술로 아직도 입원 중인데, 간호는커녕 부인은 친구 곁을 영원히 떠난 것이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에게 이토록 가혹하게 시련을 주실까? 더 큰 사람으로 쓰려고 단련을 시키시는지 모르겠다. 문상을 갔으나 위로의 말도 안 나온다.
몇 년 후 친구는 보문사에서 절친한 벗 몇 명과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요조숙녀와 재혼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처복만은 많은 친구다. 부인은 남편을 보필하여 가게 일을 돕고 밖의 일을 도맡아 한다.
전실 자식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여 가족을 잘 이끌어 다복하게 잘 살고 있다. 명랑쾌활 하면서 속이 깊은 분이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가하면 애교가 철철 넘치며, 남편을 하늘처럼 떠받든다.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 드문 훌륭한 주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