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의 여러 풍경들 (24회)

선거 때가 되면 입후보자들의 인권과 자존심은 없어지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토이다. 합동강연회에서 땅바닥에 앉아 큰 절을 하는 후보들의 사진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좀 지나치다고 느끼고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권자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고 그 후보자들은 성실하고 정직해야 하며 겸손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선거를 거쳐야 국민 무서운 줄 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비굴하게 표를 애걸하는 행위는 자연스럽지 않고 정직하지도 않다고 믿고 있다. 사람 만날 때0마다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하라는 참모들의 권유와, 농부들과 악수한 후에 손에 거름이 묻더라도 털지 말라는 충고 등은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조언들이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나 자신을 변하게 할 수는 없어서 평소와 같이 자연스럽게 행동했더니 상대방에서 내가 고자세라는 흑색선정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먹혀들어가서 고통스러웠다. 내 자신이 농민, 어민, 그리고 서민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거나 고자세로 행동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에 비해 나의 학력, 경력, 그리고 출생배경 등이 유권자들이 쉽게 접근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참모들은 막걸리 냄새나는 체취와 농민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태도를 취할 것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기본자세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속들여다 보이는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상대 후보가 때 묻은 잠바를 입고 수염도 깎지 않은 풍모로 나타나면 나는 검소하지만 단정한 옷차림과 몸가짐으로서 선거운동을 하고 다녔다. 그 대신 최대한으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대화를 하도록 일정을 짜서 하루 6시간의 휴식만 취하면서 열심히 쉬지 않고 운동에 임했다.

술을 마시지 못하면 선거운동에 불리하다는 것이 그 당시의 정평이었는데,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술잔 받는 것이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술잔 돌리는 습관은 참으로 비위생적이고 음주량을 높여서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들 잔을 돌려야 인정이 많다고 믿고 있어서 이를 거절하면 상대가 모욕적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번은 영덕군의 한 면 소재지에 가서 지방유지들을 만나는 일정이 있었다. 합동강연회가 있는 날이어서 나는 점심도 먹지 못한 공복상태였다. 차에 떡이나 빵을 싣고 다녔는데, 그 날은 그것도 없었다. 모이는 장소는 오래된 종가집 정자였고, 약 40명 정도 청ㆍ중년층이 모여 있었다.

안주는 고추와 된장, 그리고 북어무침이었고, 잔이 다섯 개 정도고 젓가락은 세 개만 있어 함께 쓰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의 우리 형편으로는 생각도 못하는 가난한 시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우 춘궁기를 면한 그런 때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이 소주잔을 들고 와서 한 사람씩 권하면서, 소위 귀족출신으로 소문난 내가 소주를 아는가에 큰 관심을 가지고 흥미롭게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빈 속에 소주 30여 잔을 단시간에 마시게 되었으니 거의 결사적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도리없이 응하게 되었다. 잠도 부족한데 술이 들어가니 졸음이 마구 쏟아졌지만 지독히 매운 고추를 씹으면서 견뎌냈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참아낸 결과 마침내 그 지역에서는 고자세가 아니라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농업종사 인구가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었다. 우리나라가 아직 공업화되지 않았던 농업국가였기 때문이었다. 농촌의 풍습도 보수적인 면이 강했고, 투표의 성향도 집안 어른들의 결정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가면 종가집에는 꼭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그 절차가 무척 복잡했다.

▲ 7대 총선에서 선거벽보를 보는 유권자들의 모습

사랑방에 안내를 받아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한참 후에 의관을 갖춘 어른이 나타나서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 난 다음 서론적인 이야기로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선거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몹시 신중해서 선뜻 대답을 해주시지 않는 분도 있지만 화담이 끝난 후 큰 소리로 “나는 문태준이 좋다.”라고 선언하는 분들도 있어서, 시간을 쪼개어 돌아다니는 판국에 30분 이상을 한 집에서 소비하게 되어 초조하던 마음을 대문을 나설 때는 즐겁게 해줄 때가 많았다.

선거운동에는 음식제공이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었지만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각좀 모임에 가면 술과 국밥정도는 필수적으로 제공해야 되는데, 당원 단합대회에서는 허용되고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금지되고 있는 법조항 자체가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맥주와 같은 고급 술은 볼 수가 없고 소주와 막걸리가 주로 사용되었다.

선거사무소나 후보자의 집은 24시간 영업하는 음식점으로 변하게 되고, 특히 장날이 되면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권자가 너도 나도 여러 후보자 집을 순방하면서 대접을 받다보니 술에 취한 사람들이 흔히 눈에 띄게 될 수밖에 없었다. 법정신으로 볼 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고, 후보자의 아내는 마치 식당 주인처럼 일해야만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국회의원이 되어야겠는가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여러 번 일어날 때가 있었다. 법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그 직분을 맡기도 전에 먼저 법을 어겨야 하는 모순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선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이런 모순되고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 두고두고 내 마음을 괴롭혔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자금의 효과적인 살포가 중요하다. 전달과정에서 누수가 심하고 말단조직까지 30%가 전달되면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런데 자금 살포는 마치 화초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되었다. 자금을 적기에 주면 화초가 푸르게 살아나는 것같이 효과가 눈에 띄게 보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금이 전달되지 못하면 뿌리까지 말라죽는 화초와 같이 살아나지 못하고 고갈해버린다. 반면에 너무 많은 돈이 뿌려질 때는 운동원의 부패가 생기고 돈이 주로 유흥업소에 흘러들어가서 물을 지나치게 많이 공급되는 화초같이 되고 만다.

나는 가급적 적은 선거자금을 사용함으로써 의정활동에서 돈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게 되기를 강력히 원했고, 돈이 많은데도 인색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선거법에 규정된 액수를 넘는 탈법적인 자금 사용도 떳떳치 못한데, 돈을 마구 뿌려서까지 국회의원 되기를 원치 않았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선거부패는 점점 심해져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10억 원이 넘는 자금이 필요하고, 심할 때에는 20억원 이상을 쓰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망국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말로는 선거제도 개혁이니 돈 안 쓰는 선거니 하지만, 당선만 되면 그만이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유권자들의 부패도 문제이지만 정치인들의 책임이 더욱 즁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선거제도의 개혁과 깨끗한 선거풍토 조성에 관해서는 많은 토론이 전개되었지만 언제나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나는 서울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에게 유권자들의 의식구조를 바꿔나갈 길이 없겠는가 하고 물어 보았더니, 그 분은 선거풍토의 개선은 정부와 여당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회답이었다. 정부에서 법을 법대로 엄하게 집행하고 여당에서 정권을 무리하게 유지할 생각만 버리면 당장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나라의 선거자금은 후보당 유권자수와 비교해 볼 때 세계 최상위권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막대한 선거자금이 어떻게 조달되는지 알 수 없고 여기에도 위법이 자행될 수밖에 없으니 우리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발전될 리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