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 활동_1 (25회)
  제4장 대학의 낭만

경북대학교 김사엽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이조시대의 가요연구>를 신랄하게 비판한 서울대학교 정병욱 교수의 논문 <한국 아카데미즘의 위기>를 예종숙 선배가 다시 비판한 글이 <아카데미즘의 패배>였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모순>이라는 비평을 써서 이 글을 반박했다. 여기에 대한 평론으로 예종숙 선배가 <비평자의 메띠에>를 썼고, 나는 <창조자의 윤리>로써 예종숙 선배의 논문을 반박했다. 나중에 예종숙 선배는 우리들의 논쟁이 <청구춘추>에 나온 전무후무한 논쟁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이 논쟁으로 나는 비평가의 기질을 배워간 것이다.     

제대하여 대학으로 돌아오니 이재선 교수가 와계셨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교수로 초빙되어 오신 이재선 교수는 처음 부임할 무렵에는 서울대학을 졸업했다는 엘리트의식과 지방대학 학생들을 얕잡아보는 시각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이재선 교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김원중, 이강원, 김운형, 장윤익 등의 제자들과 전문분야에 대해서 대화해보고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우리들은 이재선 교수와 가깝게 지내면서 현대문학의 동향을 새롭게 인식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현대문학 교수의 불모지대였던 청구대학에 이재선 교수는 새바람을 일으켰는데, 바람의 대상이 소수의 몇몇 학생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대학 3학년과 4학년 시기에 <광시곡(狂詩曲)>, <얼굴에 새겨진 가을 풍경>, <꽃의 의미는 희랍으로>, <푸른 축제의 날에>, <가을에> 등의 작품을 영남대학 논문발표회에서 <한국 시어의 의미결함에 대한 연구, 신춘시를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4학년이 되기 얼마 전 나는 정대석 총학생회장의 방문을 받았다. 정대석 총학생회장과 체육부장으로 내정된 김구종, 김광길 학형 등 세 학생이 와서 나에게 학예부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낮에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으므로 임무를 잘 수행할 자신이 없다”는 말로써, 고사했으나 정 회장이 “김구종 체육부장도 현직 경찰기동대에 근무하면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하니, 장형도 동일한 케이스니까 일을 잘할 수 있는 후배학생은 차장으로 임명하면 별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승인을 요청했다. 나는 얼떨결에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총학생회 회장을 비롯해서 인간적인 유대가 깊었던 1964년도의 청구대학 총학생회는 어느 해 보다도 가장 많은 일을 했고, 학교 당국에서도 전무후무한 전개한 총학이라고 평가했다. 

큰 행사들도 성공리에 마쳤고, 축제파티에 춤을 추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댄스교습을 하다가 댄스강사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 

학예부 차장은 손성호 학생을 임명했지만 많은 예산을 소홀히 할 수가 없어서 하루 한 번씩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와 결재하고 다시 돌아가는 곡예사의 생활을 했다. 

이때의 총학생회 회장 정대석, 체육부장 김구종, 특활부장 김석춘, 지도부장 윤무송, 학예부장 장윤익, 상과학회장 박억수, 법과학회장 김기수, 경제과 학회장 조성제, 건축과 학회장 유승호, 토목과 학회장 김문성, 학생주임 안수현 등이 졸업 후 <64구락부>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일 년에 한 번씩 부인을 동반하는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 청구대학 옛터 / 청구대학은 1967년 대구대학과 통합되어 영남대학교로 개편되었다

학예부 산하에는 문예반, 연극반, 합창단, 산악반 등이 있어서 활동이 활발했다. 문학의 밤, 합창발표회, 연극발표회, 시화전 등의 행사가 성황리에 끝나, 일한 보람에서 흐뭇한 마음을 가졌다. 그때의 나의 느낌을 한 학생회 간부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글이 <청구춘추>에 실렸다. 
J형

‘밤의 전설과 학예부장’
너무나 많은 고통을 치렀다는 표현이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나의 청구대학 역사는 밤의 전설로부터 시작된 것을 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요. 

밤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자라온 젊음은 인내와 피로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고 표현할까요. 이중생활에서 온 많은 실수의 과정을 거치면서 윗사람들과의 시비가 항상 주위에 일어났고, 전근을 네 번이나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개인의 역사는 곡예사의 생활을 닮아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밤의 전설과 학예부2장’
1964년도의 소감은 의외와 상실의 해라고 규정할 수도 있겠군요. 1960년 4월 20일의 청구대학 야간부 데모의 앞장을 서면서 형과 나눴던 이야기는 좀 보류해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때 지성이란 걸, 그리고 의분(義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은 의리가 되겠지요. 

초등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데모에 참석할 입장이 못 되었지만 해임되더라도 옳은 일은 해야 한다는 정의감이 데모의 앞장을 서게 한 것은 젊음의 분노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또한 학과 대표라도 책임감도 망설이지 않고 참가하게 된 원인이라고 솔직히 고백해야 되겠지요. 

대학의 신문과 교지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고, 5개 대학 대표로 조시(弔詩)를 낭독하고, 영남 7개 대학의 논문발표회에서 논문을 발표하였지만 그래도 야간의 대학생활은 너무 어설픈 대학의 낭만이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군요.

안으로 응고하기 보다는 밖으로 눈을 돌리기에 바빴던 대학생활은 그래도 상실만은 아닌 기쁜 과일을 딸 수 있었던 것은 J형의 도움이 많았다고 느껴지는 군요. 

J형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어정쩡한 마음으로 맡게 된 학예부장이란 직책은 일단 맡고 보니 책임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지요. 좀 더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 학예활동을 하여 청구대학의 학문과 예술의 기풍에 새로운 역사를 남겨 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솔직한 고백으로 표현해 볼까요. 

문학의 심포지엄과 미술전시회 개최를 구상하고, 학예시찰단을 구성하여 전국 대학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려고 계획했으나, 국가의 휴교 조치로 모든 계획은 남가일봉에 그치고 말았지요. 

그래서 중점을 둔 사업이 ‘청대 예술제’와 ‘시화전’이었는데, 특히 금년의 예술제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는 평을 받게 되었고, ‘연예단’을 구성하여 김천, 포항, 경주 등지로 순회하면서 그 지방 주민들의 갈채와 격려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인생의 의의와 일하는 보람을 느끼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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