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학회> (30회)
  제5장 문단(文壇)주변의 이야기들

원화여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경북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역사와 정신분석학 공부를 계속한 시기는 나의 인생 진로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 말할 수 있다. 그 후 나의 생활과 전공분야의 성장이 그때의 준비와 시간의 활용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조교생활을 하고 있을 때 김춘수 교수는 나에게 종종 “장 선생이 시를 쓴다고 들었는데 시를 가지고 오게. 그러면 내가 <현대문학>지나 다른 유수한 잡지에 추천을 할 테니까. 될 수 있는 한 빨리 추천을 받게.”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당시 김춘수 교수의 경북대학교 제자들인 전재수, 권국명, 이창윤, 윤성도, 이정우, 이하석 등이 김춘수 교수의 추천을 받아서 <현대문학>지를 통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들은 권기호 교수가 중심이 돼서 <에스프리 동인>을 만들고 나도 등단 후 <에스프리 동인>에 참가했다. 

나는 대학원 재학 시 추천에 관한 김춘수 교수의 말에 자신이 서지 않아서 망설이다 어느 날 시를 가지고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가니 책상 위에 연필로 쓴 두 편의 시가 놓여 있었다. 그 시들은 아직 발표되지 않은 시처럼 보였는데, 한편은 제목이 <잠자리>이고, 다른 한편은 지금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여튼 두 편의 시는 독자들이 감동할 만큼 매우 잘 쓴 시였다. 깊은 사유와 감각을 여과한 뛰어난 감성의 시여서, 그 순간 내 마음 속에는 내가 평생토록 시창작에 전력투구해도 이 시의 수준을 능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내 문학의 길은 시인이 아닌 다른 장르로 가는 것이 더 보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감정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마음의 결정이 실마리가 되어서 나는 작가 이상(李相)을 정신분석학이나 정신병리학으로 살펴보는 것도 보람이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상(李相) 시의 중심이 된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시, ‘의식의 흐름’ 소설 <날개>와 <지주회시> 등 이상문학이 가지고 있는 ‘난해성’을 그의 생애를 통해서 조명해보는 것은 우리 비평이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여 이상의 문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의식문학과 난해의 한계성, 이상의 경우>라는 제목으로 이상의 생애와 예술을 정신병리학과 정신분석학 이론으로 논지를 전개한 글을 써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이 글이 <중앙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에 당선되어 나는 문학평론가로서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 김춘수 시인 [출처 ; 강동문화원]      
정신분석학과 정신병리학은 당선 이후 쓴 <소월의 시에 나타난 한의 심리>, <시와 회화의 만남 - 김춘수의 ‘이중성’을 중심으로>를 낳은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정신분석학 공부는 뚜렷한 목적이 없이 시간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지만 이 시간 활용의 노력은 평생토록 나의 전공학문의 이론과 실천비평의 바탕이 되었다.     

내가 학회의 회원이나 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69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한국어문학회> 회원이 되어 ‘이상과 현실주의’를 발표한 후부터였다. 그 무렵 문경현 교수로부터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일본에서 발행된 러시아어 교과서를 중급까지 공부하고, 트르게네프의 산문시 외 몇 편의 시를 읽었다. 

당시는 러시아어 공부를 하면 이상한 눈으로 보는 시기였는데, 어찌 보면 시대의 이단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계속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은 러시아 관계의 전문가가 되었을 것이다. 

1970년 3월 대구를 중심으로 대학의 전임강사, 조교수, 석사학위 이상의 자격을 갖춘 고등학교 교사, 연구원, 그 밖의 석사학위 이상의 신문기자, 의사, 금융기관 간부 등 학술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소장학자들이 모여 <영남학회>를 만들었다.

창립목적은 지금까지 각 전공분야의 학자들이 혼자서 독자적으로 연구하다보니 독선에 빠져서 학문의 연구 진척이 잘 되지 않고, 오류와 모순을 낳는 그릇된 학계의 풍토를 개선해보자는 데 있었다. 각 전공분야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에 참여하여 유적발굴을 비롯한 전공학문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때, 보다 객관적인 성과를 낼수 있다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구체적으로 낙동강 문화를 역사, 지질학, 생물학, 토목공학, 건축, 미술 분야의 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보다 더 객관적으로 연구해보자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회장은 나이가 제일 위인 박성식(철학) 선생을 세우고, 내가 총무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문경현(나중 경북대 교무처장, 인문대학장 역임)과 나 두 사람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경현과 내가 주도하여 회원을 선임하고 발표회 등 학회활동을 진행해나갔다. 당시 영남학회에 가입한 중요 회원들은 다음과 같다. 

권오제(경제학, 중앙농협 부장), 김원중(현대문학, 포항공대), 김상한(경제학, 경북대), 김인식(영어학, 미국), 김한창(영어학, 경북대), 김윤환(역사학, 공군 대령), 니시가와 다카오(西川孝雄, 한국고대사, 일본 아이치대), 니시다니 타타시(西谷正, 한국 고대사, 일본 규슈대), 문경현(역사학, 경북대), 박성식(철학, 경상대), 손병기(물리학, 경북대), 양홍준(생물학, 경북대), 오덕수(수학, 미국 콜롬비아대), 오해수(수학, 캐나다 토론토대), 이기창(사회학, 매일신문 사회부장), 이순탁(토목공학, 영남대), 이시우(천문학, 서울대), 이우영(정치학, 경북대), 이정희(정치학, 경북대), 이죽내(정신의학, 경북대), 장윤익(현대문학, 인천대), 정규창(의학, 영남대), 정철(국어학, 경북대), 정태휘(교육학, 진주교대), 최용호(경제학, 경북대), 최환(화학, 영남대), 한점주(경제학, 경북대), 홍영석(화학, 계명대)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당시 소장학자들이었던 이들은 나중 대구 경북지역 학계를 움직이는 석학으로 존경받는 학자들이 되었다. 

<영남학회>는 3차례의 학술발표회를 비롯해서 신라시대의 고분과 비석 답사 등을 통해서 기존의 학문업적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는 사업을 시작했다. 

1970년 가을 제1회 학술발표회가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최되었다. 발표 제목은 이시우 교수의 <현대 천문학>, 니시가와 다카오 교수의 <기마민족 정복설>, 이죽내 교수의 <현대 심층심리학의 방향> 이었다. 

이시우 교수의 <현대 천문학>은 우주의 확장운동과 수축운동, 별의 탄생과 소멸, 성좌발견의 거리 문제 등에 대하여 상당히 흥미진진한 발표로 참석회원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했는데, 발표 후 질의 토론 시간이 발표자와 회원들에게 더 흥미로운 분위기로 전개되었다.

이시우 교수의 벌들의 거리와 새로운 별의 발견에 대하여 물리학 전공의 손병기 교수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거리의 계산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데, 발표의 계산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질의하고, 곧 이어 수학의 토폴로지 전공의 오덕수 교수는 그것과는 또 다른 견해의 계산법으로 질의하여 발표자를 곤혹스럽게 했다. 

여기에 대하여 이시우 교수는 “미처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물리학과 수학의 관점에서 본 두 분 교수의 견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며, 두 교수의 질의는 우리 천문학계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로써 공동연구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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