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열자 창문 옆 나지막한 침상에 성경책을 펴 놓고 엎드려 있는 38세의 청년이 눈에 띈다. 목에는 기관지 절개를 하여 튜브를 꽂고 있고 피부는 희다 못해 우윳빛이다. 버림받은 이 교통사고 환자는 온몸이 마비되어 똑바로 누울 수가 없어 엎드린 상태로 수년째 치료를 받고 있다.
기관지 절개를 한 상태라 말도 잘하지 못한다. 온몸은 장작 같이 굳어 있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행여 흡인성 폐렴이나 패혈증이 발병할까봐 천사표 간호사는 정성껏 닦아 주며 돌보고 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그는 튜브에 의지한 채로 하루하루의 생을 이어가고 있다. 참으로 안쓰럽다. 인간은 목숨만 부지한다고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도 없다.
또 다른 방의 문을 여니 절규가 섞인 울음과 외침으로 가득하다.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외치곤 한다. 그 외침 속에는 한없는 고통과 뼛속까지 시린 아픔이 들어 있다.
방문을 여니 절규가 섞인 울음과 외침으로 가득하다
그 외침 속에는 한없는 고통과 뼛속까지 시린 아픔이
그러나 청진기 하나로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그 아픔을 이해할까? 당장에라도 허우적거리는 팔놀림을 잡아주고 굳어있는 근육을 펴주고 싶다. 그러나 청진기 하나로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초입에서 인공지능과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어서 빨리 융복합하여 장애인들의 삶을 변화시켜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질병 없이 입소한 노숙인과 경증장애인은 방마다 둘러앉아 봉투붙이기, 쇼핑백 만들기, 종이접기 등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이 사회가 그들을 버린 건지, 스스로 사회로부터 탈출을 한 건지 알지 못한다. 비록 작은 노동이라도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교육을 받았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없다. 그저 주는 밥 먹고, 주어진 양의 작업을 한 뒤 나머지 시간은 멀뚱멀뚱 서성거리다 하루를 마무리 한다.
가끔 앞마당에 있는 기차 카페에서 500원짜리 커피 한 잔 사 먹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미래를 포기한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곳은 1,100명의 남성 노숙인과 장애인이 수용된 ‘은평의 마을’이다. 가톨릭 정신으로 오갈 때 없는 부랑인들의 의식주를 도와주고 진료를 해주면서 사회 복귀를 위한 재활 사업을 하는 곳이다. 이 시설에 들어온 노숙인과 환자는 정붙일 데가 없고 연고자도 찾아오지 않는다. 보호자가 있다고 해도 형편이 안 되어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은 이 사회가 얼마나 냉혹한지를 체험한 사람들이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표정, 무감각한 상태로 삶을 포기한 것 같아 보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을까? 나락으로 떨어질 때까지의 인생 파노라마를 저마다 펼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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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은평의 마을 4차 봉사활동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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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사방에서 나를 주시하는 그들의 눈빛이 두려웠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보듬어 주기로 마음먹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들의 손을 잡고 인사 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겁에 질린 표정과 함께 말문을 닫아 도무지 대화할 수 없었다. 병실에 장기간 입원한 사람들은 그나마 편안한 얼굴이다. 올 데 갈 데 없이 노숙인으로 방황하던 그들에게 따뜻한 식사와 편히 잘 수 있는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치료 받을 수 있으니까.
처음 방문 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연약한 간호사가 나무 침대에 누워있는 장애 환자를 일일이 손으로 들어 올려 간호하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사회공헌협의회의에서 즉시 15대의 자동 철제 침대로 교체해 주었다. 간호 일이 좀 쉬워져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의 마음도 흐뭇하였다. 김치 냉장고, TV, 에어컨 등을 방문 때마다 설치해 주어 그들의 불편함을 덜어주며 편의를 도우려 노력하였다.
보건의약단체 사회공헌협의회(이하 사공협)는 의료분야에서 일하는 14개 단체가 모여 2006년에 설립되었다. 그 당시 나는 의협 정책 이사의 일을 하면서 이 단체를 창립하여 현재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각 단체의 특성에 따라 의료봉사, 노력봉사, 후원 물품 기부를 기본으로 한다.
의료봉사는 작은 종합병원 못지않게 진료하며 고령 환자 돌보기, 장애인과 장애 어린이의 식사 도우미, 놀아주기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한다. 후원품은 500~1000만원 상당의 비용으로 각 시설에 원하는 물품과 부족한 장비를 지원한다.
지난해에는 강원도 육군 제22, 23사단에 ‘사랑의 독서 카페’를 기증하였다. 이 나라의 아들들은 무더운 여름이나 혹한의 겨울에도 망망 동해를 바라보고 마음을 다지며 나라를 지키고 있다. 이 독서 카페에 들어가 차 한 잔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군대 생활과 제대 이후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동안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 같은 삶을 살아가는 중증장애아동과 선천성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들에게 부모 노릇을 하는 영락 애니아의 집, 선천성 기형 아동을 돌보는 승가원과 노아의 집, 여성 장애인과 노숙인 시설인 영보자애원 등 각 시설마다 수차례 방문하였다. 우리 사회는 아직 따뜻하다. 돌봄의 정신이 뿌리내려 많은 단체에서 이들을 보듬어주고 있다.
힘든 삶을 살아가고 하루하루와 싸우고 있는 장애인들은 비록 이곳에서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하지만, 마음의 장애까지 고칠 수 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인생을 포기한 노숙인에게 일자리와 따뜻한 밥을 제공한다면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봉사자들이 도움을 준 다지만 역시 장담할 수 없다.
봉사자는 마음을 열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주고자 할 수 있는 일을 한다지만 상처받은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는지. 봉사단 버스를 향해 두 손을 흔들며 해맑은 미소로 배웅하는 그들을 보면 마음이 늘 무겁고 짠하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곳곳에서 활약을 한다. 기부문화와 봉사문화가 확산되면서 함께 사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한 줌의 따뜻한 마음을 이들에게 전할 때마다 나는 좀 더 겸손해지고 숙연해진다. 봉사의 힘은 나를 성숙시키고 마음은 푸근해지면서 인간의 삶을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은평의 마을’에 처음 방문한 날 사무국장이 “오늘 하루 봉사하려면 사양합니다. 가늘고 길게 오시기를 원합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을 마음에 새겨 사공협의 봉사는 어느덧 1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 넓은 지역으로 사랑의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