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사람, 큰 일한 사람
김하준
(전 국립 여수대학교 총장, 교원공제회 이사장, 교육부 기획관리실장)
불굴(不屈), 부도(不到)의 의지인 ‘독한 사람’ 장윤익 박사의 대학교수 생활을 마감하는 정년퇴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그리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닥 잡기가 힘듭니다.
장 박사와 필자는 국민학교에서 만났으니 순서대로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 박사는 초등학교부터 눈썹이 유난스레 검고 코가 약간 들린 듯 하며 크게 뚫려 소견이 넓고 어른스런 모습이었으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의론과 명분을 찾는 친구였습니다.
5학년 때는 6.25전쟁으로 교실을 징발당하고 황남, 탑정동에서 담임선생님이 사시는 동네인 성건리 동사무소로 우리 반이 옮겨가게 되어 책상과 의자를 새끼로 동여 등에 짋어지고 시장통 질퍽이는 흙탕길을 발이 시리고 젖어도 의당 할 일을 하는 것을 치부하며 거리낌 없이 건넜던 기억이 납니다.
워낙 의외의 동네고 먼 길이라 반발심도 있었으나 몇몇 공부가 좀 앞서가는 소위 ‘오피니언 메이커’들, 즉 장 박사를 포함한 몇이서 선생님을 이해하고 불만을 없애기로 하였고, 어린 나이에 먼 길을 참고 다녔습니다.
6.25전쟁이 한창 절정이던 1951년에 우리는 6학년이었으며, 교동 향교 교사(校舍) 시절인 이해 또한 지금도 우리 모임에서 화제가 되곤 하는 기막힌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학 진학을 앞둔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워낙 술을 즐기신 분이라 우리들에게 국어, 산수, 사회 등 5과목으로 분반하여 각 과목별 반장을 뽑아 시간별 자유학습토록하시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실에 나타나지 않는 날이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 맡은 과목을 연구하여 자습을 시키고 시간이 되어 종회 때가 되면 선생님을 찾아 술집으로 갔고, 선생님의 명에 따라 반장이 총회를 대행하곤 하였습니다. 그때는 전화도 없었고, 교통수단인 자전거도 없어 교장, 교감선생님의 감독이 미치지 않았기에 6학년 담임선생님이 자율학습을 위주로 넘어갈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전쟁 와중에도 중학입학 시험을 국가고시로 치렀는데(지금의 수능시험과 유사), 우리반 성적이 일등하였고, 경주군(지금의 경주시) 내 전체수석도 우리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우쭐하시며 교육방법에 대한 자찬이 대단하셨고, 우리는 그저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장 박사는 그때도 높은 점수로 경주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중학시절에도 항상 조용한 모습으로 눈망울이 또렷하였고, 코가 약간 막힌 음색으로 공부도 잘하여 친구들 간의 토론을 잘 끌어나갔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그때는 참으로 진학하기 어려운 대구사범학교를 갔기에 고등학교 공부는 함께 하지 못하였으나 늘 간접적으로 소식을 들으며 무덤덤하게 소식이 없어도 소식을 아는 사이로 연이 이어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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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하준 전 여수대 총장 [출처 ; MBC 뉴스 캦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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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4.19와 5.16을 겪으며 서로가 어렵고 바쁜 생활을 하느라 소식이 뜸했는데, 필자가 문교부에 있던 어느 날 장 박사가 교편생활을 하며 학업을 계속하여 영남대를 졸업하고 경북대에서 석사학위, 그리고 명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멀리 관동대학교 교수로 잠시 갔다가 갑자기 인천대학교 교수라고 직함을 들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축하하기에 앞서 “에이, 독한 사람”이라는 말을 먼저 꺼냈습니다. 장윤익은 겉으로는 양순한 것 같지만 속에는 ‘독하디 독한 의지를 감추어온 독종이다’라고 악평하며, 자랑하는 선망의 적으로, 존경받는 학자로, 우리들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범학교를 나왔으면 초등학교에서 크며, 늙으며 머리 빛깔이 허연 교장선생님으로 모습이 바뀌어 갈 것으로 지레 믿어왔는데, 어느 날 대구 대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네 하다가는 박사가 되어 대학교수로, 그리고 조금 후에는 인천대학교 총장, 조금 더 후에는 고향인 경주대학교 총장이 되어 나타났으니, 그때마다 이런 변천과정을 엮는 내력들이 상식선에서 쉽게 연결이 안 되어 약간은 멍해진 기분이었습니다.
곰곰이 되씹으면 이건 보통에 속한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이룰 수도 없는 독한 사람의 독보가 이룩한 믿기지 않는 일들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장윤익 박사는 자랑스런 동창으로 모임 때마다 ‘회자(膾炙)’되는 친구로, 그리고 ‘역시 독한 사람은 장윤익이다’라는 등식으로 이어지면서 낮선 사람에게도 성공사례의 “예”를 들어 말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장 박사의 학자로서의 활동이나 업적은 필자가 감히 말하기 어려움에 다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언제는 문학평론을 하고, 창작활동도 간혹 보이는가 하더니 <북방문학>을 평가하고, 어느새 <남방문학>에까지 깊이 들어선 사방무대로 영역을 넓히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참으로 믿음직하고 추종하기 어려운 원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근래 <동리ㆍ목월기념사업회> 회장이라는 어려운 일을 맡아 우리 고장의 대가이며, 우리고장의 거목(巨木)이신 두 분 선생님의 크나큰 족적과 이룩하신 입지를 이 세대는 몰론 다음에까지 널리 알리고 심어주고자 애쓰고 있는 일은 정말 큰 족적을 남길 것으로 믿습니다.
경주인의 자랑, 자긍(自矜),을 일깨우는 일에 혼신 노력하고 있는 외우(畏友) 장윤익 박사가 무한히 넓고 크며 자랑스럽지가 그지 없습니다.
장 박사는 이미 정년이라는 고리가 없을 것입니다. 잠시도 생각하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몸져누울 친구이기에 정년이라는 고비를 새로운 시발점으로 삼아 또 하나의 큰 일을 꾸미고 잔잔한 미소로 우리들 앞에 다가와 “내가 이것을 좀 시작했네.”라고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존경하는 장 박사! 남은 일도 보기 좋게 매듭지으며 건강도 돌보고 못난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리며 함께 즐기는 넓고 포근한 여생이 이어지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