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을 넘어선 삶의 동반자
서영수
<시인, 경주대학교 강사>
중학에서 만난 장윤익
장윤익과 나와의 관계는 흔히 말하는 ‘우(友)’의 세계를 넘어선 그야말로 ‘붕(朋)’의 경지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 장윤익. 그와의 첫 만남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1952년 봄 우리는 나란히 경주중학교에 입학했다.
6.25전쟁의 상흔이 온 누리를 휩쓸어 가난과 역경이 우리들의 동심을 황사 바람에 흩날리고 있을 때였다.
학교 교사(校舍)는 군에 징발되어 우리가 입학한 교정은 다닥다닥 지은 판잣집 가교사였다. 검게 칠한 판자 위에 양철지붕을 덮어 비 오는 날은 하늘이 멋진 장단을 내려 자연음악실이 되었고, 칸막이는 했지만 방음이 되지 않아 한 교실에서 여러 선생님의 음성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장윤익과 내가 입학한 해는 처음부터 이러한 공간도 차지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어 하급생에게 부여된 노천 수업이었다.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작은 육판을 비스듬히 세우고 우리는 A, B, C를 배우다가도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은 그날 수업은 끝나는 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고생 같았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야! 비 온다. 가자.”
희희낙락하며 피하는 그때의 철부지 대열 속에서 장윤익과 나는 우정을 싹틔웠던 것이다. 입학식이 끝나자 같은 반에 편성된 우리들 학반은 1학년 A반, 그때 장윤익은 내 옆자리의 짝이 되어 첫 얼굴을 마주했다.
담임은 수학을 하시는 최윤상 선생님이었는데 깡마른 체구에 음성이 칼칼하셨고, 연방 눈을 깜빡 감빡 하시면서도 유머스러한 인상은 오늘도 생생히 잊을 수가 없는 분이었다.
장윤익은 수학을 잘했다. 수학 뿐 아니라 전 과목을 잘 하는 수재였다. 그러나 나는 그만큼 못했다., 그러면서도 곧잘 붙어 다녔던 걸 생각하면 무언가 우리는 통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
학년이 바뀌어 다른 반으로 편성되어 2학년이 지나고 3학년 졸업반이 되면서도 우리는 처음 만나 1학년 시절보다 더 친하게 지냈다. 그는 눈과 눈자위가 다른 사람들보다 동그랗고 유난히 검었다.
곧잘 웃기도 잘하면서도 헤픈 학생이 아니어서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운동에도 마음을 두어 우쭐댔는데 3학년 때인가 농구선수가 되어 학교 대표로 도(道)대회에 나가 우수선수로 뛰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능력을 알만한 일이었다.
대개가 그러했지만 장윤익과 나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공납금 납부율이 아주 저조했던 전반적 추세라 학교 당국에서는 공납금 미납 학생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며 최후의 독촉을 한 때가 우리 시대엔 가끔 있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자유시간을 얻어 쫓기듯 우루루 몰려나와 반월성 계림을 누비며 하루해를 보낼 때가 있었다. 집에 간들 공납금이 마련될 리 없는 뻔한 사정을 알고 있는 터라 월성 잔디 위에서 뛰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다.
그때 우리 중학생에겐 읽을 만한 책이나 잡지도 흔치 않았는데, 무엇이든 읽고 싶었고, 우엇이든 쓰고 싶은 충동뿐이었다. 그런 탓이었는지 나는 중학교 2학년 말부터 문학병이 걸려 시가 뭔지 모르면서 시를 쓴 노트를 차곡차곡 늘이면서 유일한 학생잡지였던 <학원>지를 읽고 곧잘 시를 발표하며 이름 석자가 활자화되는데 충족하고 있었다,.
이 무렵 공부만 잘하는 장윤익은 나로 인해 문학병이 옮아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납부금 관계로 공적 조퇴를 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평소에도 방과 후가 되면 경주 산천을 누비는 두 시인이 되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우리는 그때 산책로도 아닌 길을 걸으며 많은 것을 얘기하며 다투기도 하고 합일하며 만족하기도 했다. 건방졌던 문학소년, 철부지의 소년시인 시대가 잊을 수 없어 마냥 그립다.
원두막에 얽힌 삼총사의 풍류
장윤익의 집은 황남리, 나의 집은 들판 하나 사이에 둥 사정리에 있었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학교에서부터 파한 후에도 저녁 무렵이면 깊은 사색이나 하는 듯 고도의 오솔길 또는 신작로를 누빌 때가 많았다.
장윤익과 나는 문학소년으로 티를 냈지만 운동 잘하고 날렵하며 주먹께나 쓰는 학생으로서 우리는 매일같이 자리를 함께 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인보였다. 그가 일찍이 오리 둘의 뇌리 속엔 떠날 수 없는 그리운 영상이 되었지만 장윤익을 얘기하는 자리에선 빼놓을 수 없는 친구였다.
그는 당수, 가라데를 잘 하는 학생으로 잘 알려졌지만 의리와 믿음이 강해 속정이 깊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터놓고 지냈던 사이였다. 장윤익은 그러한 박인보와 당수를 하며, 가라데를 배우며 유단의 경지에까지 이르러 흰 제복에 붉은 띠, 검은 띠를 번갈아 메고 다닌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찌는 듯한 여름 어느 토요일이었다. 우리 셋은 오릉 옆 후미진 들판 어느 원두막에 올랐다. 이곳은 나의 집 토마토 밭이었는데, 곧잘 우리는 이곳을 찾곤 했다. 매미소리가 온 들판을 흔들어 깨우고 아카시아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오솔길은 우리의 풍류를 안내하듯 꼬불꼬불 선을 긋고 있는 언덕배기에 높다랗게 통나무로 지워놓고 토마토밭을 지키던 원두막을 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김용호의 저서 <시문학 입문>을 들고 장만영이 쓴 <현대시 감상> 등등을 펴놓고 비판도 하고 감탄도 하며 하루해를 보냈다. 그때를 회상하니 그것이 바로 장윤익과 나와의 인생의 문학기행 출항 선상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한 통속으로 떠들다가 보니 뱃속이 헐출해지자 우리는 토마토로 배를 채우자는 생각이 일치하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토마토 많이 먹기 ‘내기’를 하자는데 이르렀다. 씨알이 똑같은 것들을 엄중히 백여개 따다 광주리에 담아놓고 다투어 먹기 시작했다.
마침내 결과는 1, 2, 3등이 나왔지만 1등 한자는 기쁨도 없이 앓기 시작했고, 배가 불러 일어서지도 못해 결국 약방 신세를 지고야말았지만 그 장면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난 속에 낭만이기도 했고, 소년기의 무모한 장난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때 티없이 경쟁하고 거짓 없이 갖고자 했던 승부근성의 추억을 남겼던 때라 반세기가 지난 오늘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경주중학을 졸업하고 각기 헤어졌다. 장윤익은 대구사범, 박인보는 경주공고, 나는 경주고등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마다 만나 즐기며 변함없이 자랐는데, 갑작스런 박인보의 죽음은 슬프다 못해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장가들 나이에 미혼의 청춘시절 비명으로 느닷없이 가버린 그가 애석할 뿐이다.
고향에서 관(官)을 쓴 장윤익
대구에서 사범학교를 다니며 집도 이사하여 대구에 머물던 장윤익은 문학도로서의 꿈 많이 외길을 나와 함께 여전히 걸었다. <칡넝굴>이란 문학서클을 이루어 놓고 우리는 무던히도 많이 쫓아다녔다.
그 <칡넝굴>을 대구 경북에서 글께나 쓰는 학생들의 모임이었는데, 대구에서 발표회를 열고, 신문 등지에 시와 산문을 의젓이 싣기도 하면서 당시 대구역정 미국 공보원 전시실을 빌려 <칡넝굴> 시화전을 몇 차례 열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의 대구 숙소는 언제나 장윤익의 집이었다. 그 무렵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참으로 많지만 지면관계로 쓰지 않으나 영원히 간직할 우리 둘의 필름은 생생한 게 많다.
나는 대학에 다닌답시고 서울에 있을 무렵 그는 당시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곳이 첩첩산중 내남 박달이었으니 애숭이 선생님으로서 어찌 웃음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시작한 그의 교직생활은 전국을 누비는 시발점이 되어 대 구변두리에 있으면서 대학을 졸업했고, 이어 뼈아픈 노력으로 석, 박사과정을 치루 었던 장윤익은 쉬지 않고 무던히도 많이 옮겨 다녔다. 대구, 서울, 강릉, 인천을 누볐는가 하면 초등, 중등, 대학의 교직을 빠짐없이 두루 거친 선생다운 선생으로 뛰면서 변모했다. 그러기에 그의 이력서를 펴면 너무도 길고 길어서 두루마리를 해야 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학구와 직업에 몰두하면서도 문학에의 집념은 여전하였는데, 그는 소년시절 접근했던 시작(詩作)의 방향을 돌리더니 마침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평론가로 데뷔했다. 그러면서 나와의 교신은 언제나 문학 이야기가 앞섰고, 떨어져 살면서 기쁜 소식, 슬픈 변고가 있으면 이웃같이 나누어 가지며 살았다.
나는 <현대시학> 3회 추천을 완료하여 시인의 길에 올랐지만 그는 신춘을 통한 평론가가 되어 늘그막에도 처음 만난 중학교 때 짝궁으로 돌아와 문단을 지키며 고향을 닦고 있다.
장윤익의 천성적인 의지와 집념은 그의 삶에 커다란 디딤돌이 되어 매사를 이루었고, 남다른 투자는 늙음을 밀치는 비법으로 여겨 오늘을 살아온 장윤익. 역마살이 붙었다는 그의 발길이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 고향의 대학에서 정년으로 마무리하는 빛으로 남게 되었으니 어찌 축하하지 않으리.
나의 벗 장윤익!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대학교수, 대학총장이란 찬란한 관을 쓰고 이제 우리함께 남은 시간 남은 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보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