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지 않은 날이 없는 장윤익 형
서정호
전 KBS 대구방송 총국장
장윤익 형과 나는 <청구회(靑邱會)> 회원으로 반세기를 함께 살아왔다. <청구회>란 대구사범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함께 나온 친구 여덟 명의 친목 모임이다.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해마다 일 년에 두 번씩 모여 우의를 다져나가고 있는데, 재작년에 권유화(權裕和) 형이 이승을 떠나 지금은 일곱 명이 있다.
사람이란 긴 세월을 함께 살다보면 서로 부대끼고 닮으면서 특색들이 마멸되거나 퇴색되어버리거나 아니면 동화되어 뚜렷하게 꼬집어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다.
장윤익 형도 그렇다. 꼭 꼬집어 이야기할 만한 것은 없지만 또 사람을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다르고 사람마다 사람이 다르게 보이기에 다른 각도에서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본다.
장윤익 형은 고등학교 시절부터니까 나와는 반세기를 함께 교유(交遊)해왔지만, 나에게는 욕심이 없고 소탈한 사람이면서 참으로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사는 친구로 각인되어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모임이지만 그는 늘 바빠서 우리 모임에서 출석률이 나쁠 뿐만 아니라 참가하여도 일정에 끝까지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늘 모임 중간에 다른 모임이 있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그런 장윤익 형에 대해 우리 중에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는 바쁘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바쁘게 산다.
1960년대 말, 그 무렵 나는 교직에 있으면서 KBS대구 방송국 단막 드라마 공모에서 당선되어 라디오 드라마 작가로 <KG극장>이란 단막 드라마 프로그램과 농촌계몽 프로그램인 <마을의 솔봉이>에 글을 써오다가 드라마 작가의 길보다 방송국 프로듀서로 일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프로듀서로 전직을 한지 6개월이 채 안 되는 때였다.
나는 그때 결혼 2년째에 접어들었고, 장윤익 형은 모 여고 국어교사로 있으면서 결혼 일 년이 좀 지난 때였다.
1969년 3월 1일 삼일절 아침이었다고 기억을 한다. 모처럼 공휴일이었고, 태어난지 4개월밖에 안된 첫 아들이 밤에 유난히 보채고 울어 겨우 이른 아침에 단잠에 빠져있었는데, 아내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장 선생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눈을 비비며 대문 밖으로 나가보니 그가 얼굴에 희색이 가득한 채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나 아들 낳았어!”
나는 축하한다고 말을 하고 집에 들어가자고 했더니 그는 병원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빨리 집에 들어가 눈을 좀 붙여야하겠다며 휑하니 가버렸다. 걸어가는 뒷모습의 어깨는 유난히 넓어보였고 발걸음은 가볍게 보였다.
골목을 돌아 사라져간 뒷모습을 보면서 참 바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와 아내에게 그 말을 하였더니 “우리가 결혼하여 첫 아들을 낳은 게 어지간히 부러웠던 모양이지요.”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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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호 전 KBS 대구 총국장 [출처 ; 메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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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여덟 명의 <청구회> 회원들은 모두 결혼을 하였고, 장윤익 형이 제일 끝에 결혼을 하였다. 그래서 여덟 명 회원 모두 아이들이 있었는데, 우리 회원들 사이에서는 유독 늦은 결혼이었기에 그는 아이가 없었다.
“아들 낳았어!” 하는 그의 말이 ‘너만 아들을 낳았느냐, 나도 아들을 낳았다.’하는 말로 들릴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쁘게 사는 그의 생활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아니 그 후에 알려도 될 일이긴 하지만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 기왕 조금만 돌아가면 될 일이기에 우리 집에 들러 알리고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럼 사람이라고 늘 생각한다. 일을 만들어서 바쁘게 사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늘 바쁠 수밖에 없다. 남이 하나를 하면 그는 둘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가끔 그날 그 행동에 대해 아들을 낳은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욕심 없이 살고, 자기 일을 묵묵하게 열심히 살며,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살지 않는 그가 왜 우리집에 제일(?) 먼저 와서 그 말을 던지듯 하고 갔는지, 그때 그 속내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바쁘게 사는 그를 나는 늘 부러워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칡넝굴> 문학 동인으로 시를 쓰며 우리 또레에서 문명(文明)을 날렸던 그가 시를 접고 평론의 길을 선택하였고, 주경야독의 바쁜 대학시절에도 문예부장의 일을 맡아 교지를 편집하며 나의 되지도 않는 시나리오을 교지에 실어주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 교지를 갖고 있지 않지만 시나리오 같잖은 그 습작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리고 내가 신춘문예 병에 걸려 열병처럼 앓고 있을 때, 그는 거뜬하게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을 하여 평론가 반열에 올라 부지런히 평론가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아직도 그 꿈(신춘문예)에 살고 있지만........
그렇게 내가 부러워하는 일을 착실하게 걸어온 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모든 일에 열의가 대단하였다. 그래서 바빴다. 할 일을 스스로 만드는 것은 바쁘게 사는 것이다.
1970년대 라디오방송이긴 하지만 내가 맡았던 <주부시간>에 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단어가 문득 떠올랐고 내가 제작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어떻게 이를 용해시킬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문학평론가인 장윤익 형이 떠올라 <문학 작품 속의 여인상>을 기획하여 방송을 그와 의논을 하였더니 직장을 가지고 바쁜 와중에서도 쾌히 승낙하고 무려 1년 반 가까이 방송하였다. 그리고 한 번도 결방을 하지 않았고 내용도 재미있고 충실하게 방송을 하였다는 것이 내 기억에 떠나지 않는다.
<문학 작품 속의 여인상>이 끝난 이후에는 말솜씨도 한결 나아져 방송연사로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비상용으로 치부를 해놓고 이용(?)을 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방송에서 방송연사들의 돌발사고로 방송을 펑크 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담당 프로듀서는 등에서 콩이 뛰고 안절부절 할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화술이 좋고 즉시 방송국으로 뛰어올 수 있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는 나의 비상연사(非常演士)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저런 일들이 어제 같은데 함께 <청구회>회원이었던 권유화 형은 재작년에 이승을 떠나 고인이 되어버렸고, 장윤익 형은 어느새 교육자의 모습으로 교단을 떠나게 된다니 아쉽다. 그러나 평론가로 더 알려져 있으니 뭐가 걱정이랴? 바쁘게 살면서 욕심 없이 소탈하게 사는 그가 교단을 떠날 뿐이지 할일은 태산같이 있을 것이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죽을 때까지 일을 만들고 바쁘게 살 것이다.
인생이 까닭 없이 슬퍼지는 만년에 그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 것이다. 더 좋은 평론으로, 문인들의 훌륭한 조언자로 살아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