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구천동과 쪼타이부대
배철웅
<동명정보대학교 교수>
“쏴아~!” 하고 세월이 흐르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세월이 살 여울목을 만나 세찬 물살을 이루며 흐른다. 그 물결처럼 세월도 흐르고 인생도 흐르고........
세월이 유수 같다더니 요즘 세월은 총알처럼 날고 미사일처럼 내닫는다고 할 만큼 가속도가 붙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누군가 요즘의 한 해는 고대 이집트 시대의 3천년과 맞먹는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장윤익 학형과 내가 함께 대학을 다녔던, 그때가 바로 어제의 일 같으면서도 까마득한 태고적(太古的) 일 같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장윤익 학형이 다정하게 웃던 모습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세상이 컴퓨터와 휴대폰, 자동차들이 내뿜는 독가스로 뒤덮이고, 사람의 마음마저 썩고 있는 오늘의 꼬락서니를 보면 펜에다 잉크를 찍어서 글을 쓰며 “인생은 유유한 것이야....” 하던 그때가 태고적처럼 아득하게 멀어 보이기도 한다.
그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청년이었다. 학생시절에 벌써 시(詩)로 필명을 날리던 문학도답게 정다우면서 맏형처럼 의연한 데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온화한 성품이었다. 항상 웃을 뿐만 아니라 말하는 품새도 사람을 감싸 안 듯이 부드럽게 해서 보두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기술을 지닌 듯했다.
“어이 장형, 니 혹시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와 자꾸 웃노?”
한번은 이렇게 비꼬듯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래도 그는 소이부답(笑而不答)으로 여전히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대학 일학년 교양과목으로 <대학한문>을 선택했는데, 그때 그 ‘소이부답(笑而不答)’을 배웠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신 서경보 교수님의 과목인데, 그 서 교수님에게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필자가 <국제신문>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부산의 유명한 서예가요, 한학자였던 경제 조영조와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그와 단둘이 한잔 하는 자리에서였다. 술이 한 순배 돌고 거나해지자 그가 한시(漢詩) 한수를 읊으면서 나도 한수를 읊는 식으로 시를 안주로 해서 대작을 했다.
그날 내가 외운 시는 왕유(王維)의 ‘죽리관(竹裏館)’, 두보의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백거이의 ‘초당(草堂)을 비롯해서 ’포도미주를 야광배에 욕음코저 하니‘로 시작되는 왕한(王翰)의 ’양주사(凉州詞)‘와 ’당시(唐詩)‘는 아니지만 고려시대의 유명한 정지상(鄭知常)의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까지 수십 수가 넘었을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경제(敬齊)가 일갈했다.
“에라니 니가 면장 다 해묵어라! 어데서 그 당시(唐詩)를 다 배웠노?”
내가 대학 <교양한문> 시간 서정보 교수님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하자 그는, “그때 대학생이 지금 교수보아 실력이 낫다. 그 서 교수님이 대단하셨던 것 같다.”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 서 교수님은 진짜 학자이셨고 그래서 나는 여지껏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표로 서 교수님을 마음속으로 받들어 왔다.
그러나 그 서 교수님뿐만 아니다. <경제원론>의 이윤근 교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수코리니코프가 수전노 노파를 도끼로 죽이는 장면처럼 대구 대봉동의 가다구라[片倉] 공장의 굴뚝 위에 박힌 피뢰침의 순금꼭지를 훔치려고 했다는 애기를 해서 우리 젊은 가슴을 뛰게 했다.
<행정학>의 신종순 교수님은 일종의 고시 경멸론자였다. 그는 “고등고시 같은 것 치지 마라”고 역설하셨다. 젊은이들은 그런 달달 외는 시럼공부 따위보다 진짜 학문을 한번 할 용기와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신 교수님의 지론이 나는 너무 좋았다.
원사강독의 이윤구 교수님은 가극 왕 카루소가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내가 카루소요.”하고 뽐냈더니 식당주인 왈 “아이고 그 로빈손 크루소가 외딴 섬에 있다더니 언제 왔습니까?”하고 반기더라 해서 사람의 배꼽을 쥐게 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본전을 빼려고 스펀지가 물을 빨듯이 지식을 빨아들였다. 요즘 대학생들은 책을 안 읽지만 우리는 참 많이도 읽었다. 그러다가 대학 뒤쪽 둥글관에 가서 막걸리를 또 많이도 들이켰다. 요컨대 흡수하는 것이 우리의 본무인양 뭐든 흡수하려고 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우리는 <12인회>라는 걸 만들었다. 물론 장윤익 학형과 필자도 핵심멤버였다. 전공도 다르고 학과도 다른 학생들의 모임이었으나 우리는 그런 것을 넘어서 광범위하게 교유(交遊)하자는 생각이었다.
하루는 그 <12인회>가 막걸리를 취하도록 마시고, 당시의 대구시청 앞을 지나가다가 푸른 제복을 입은 한 무리의 공군사병들과 조우했다.
‘길을 비키라느니, 너의 쪽에서 비키라느니’ 유치한 싸움 끝에 결국 치고받는 난투극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장윤익은 그 당시에 이미 태권도의 유단자요, 영문과의 김재우 군은 대구 최강이던 능인고 럭비팀 주장이며, 대구 최고의 주먹이었다. 완력으로 해도 우리가 꿀릴 이유가 없었다.
결국 공군들이 밀려 그 근방에 있던 자기들 부대로 부랴부랴 도망을 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제지하는 보초병을 본척만척 공군부대 안으로 밀고 들어가서 “야 이놈들아, 어디로 숨었느냐!” 하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다가 그 날의 소동은 유야무야로 끝이 났지만 그 공군부대가 충돌해서 우리를 역습했더라면 어찌 됐을까. 그런 유치한 것이 청춘의 특유한 매력일 수도, 애교일 수도 있다 하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막걸리 때문에 빚어진 일대 실수극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윤익은 <12인회> 핵심이라 그런 돌발사건에 휩쓸리긴 했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신중하고 의연했다.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술 먹은 사람처럼 얼굴만 불콰해질 뿐 화중을 밖으로 표출하는 법이 없었다. 말하자면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나 할까.
하기야 수양이라는 것, 인격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스스로가 자신을 얼마나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하지 않던가. 비록 가까운 친구지만 나는 내심 그런 그를 존경하고 하나의 본보기로서 배우고 노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학창시절의 우스꽝스런 추억 한 가지. <12인회>의 김종옥 군이 장가를 들게 됐는데, 그는 전북의 무주구천동에서 대구까지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었다. 그 학생 신랑을 따라 <12인회> 전원이 예식이 열리는 그 무주구천동 신랑신부집까지 배행키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상객(上客)으로 갈 열두 명이 죄다 정장에다 보우타이를 매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나비넥타이, 즉 보우타이를 보우타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무주구천동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짜기 마을이다. 동네에 들어서면 머리를 길게 땋고 댕기 맨 처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가다가 낮선 도시사람을 보고 서둘러 종종걸음을 치곤했다. 전기는 마을 앞 시냇물로 물레방아를 돌려 겨우 전등을 켜는데 희미한 30쪽짜리가 껌뻑껌뻑 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산골짝 동네에 난데없이 쪼타이 부대가 나타난 것은 희극도 비극도 아닌 그저 한바탕 유치찬란한 장난이었다. 찰리채플린이 콧수염에 쪼타이 매고 익살을 부리듯이 12인도 무주구천동 대자연을 부대로 웃기지도 않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옛날 전치판에서 흔히 그랬듯이 술내기가 벌어졌다. 마을에서 빚은 진국 동동주를 동이로 갖다 놓고 퍼마시는 시합인데, 이쪽 선수로 떼밀려 나간 필자가 저쪽 선수를 이긴 맹랑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치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인데, 그 때문에 필자는 목에서 피가 올라오는 고생을 겪었다.
이튿날 신랑의 부친께서 감춰두었던 아편덩이를 갖고 와서 그 놈을 파리똥 만큼 떼어서 내 목에다 던져 넣고 물로 삼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연방 나오던 토악질이 멎고 속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닌가.
손꼽아보니 그게 모두 40년도 더 된 옛적의 일이다. 눈 한번 감았다 뜨니 한 평생이 갔더라고 하더니 그새 40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하기야 토마스 어빙의 ‘립 밴 윙클’도 마누라의 바가지가 무서워 뒷산에 올라가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수십 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 40년의 세월동안 많은 사람이 가고 또 왔다. 많은 것을 잃기도 하고 또 얻기도 했다. 인걸도 간데없고, 산천도 변했다. 인생무상이요,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오랜 우정만은 변함없이 한결 같으니 그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일이 무엇일까 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