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좋은 벗 셋이 있다면
황진동
<전 영남대학교 의료원 사무국장>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친구와 같이 보낸 지난 시절이 우연치고는 정말 묘한 인연인 아닌가? 우리의 우정을 끈끈이 맺어준 것은 대학 졸업 후 청구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시기가 실마리가 되었다고 생각되네.
그후 상서여상(尙書女商)에서도 근무했고, 서울에서의 객지생활에서도 늘 만나게 되었고, 고향으로 되돌아와서 고향의 발전과 연계되는 일을 한 것도 서로가 닮은 생활이 아닌가. 그 많은 세월 속에 쌀인 잊지 못할 추억은 다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얼마나 매달고 있을까.
어제의 청년 장윤익이 학자와 교육자로서, 그리고 대학의 경영자로서 문닫과 학계, 대학행정에 크고 많은 업적을 남기고 정년을 맞이한 게 되었다니, 세월이 빠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네.
비록 제도적인 절차로 현직에서 물러나지만, 친구는 아직도 건강하고 할일이 많으니, 우리에게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 않던가?
청구고등의 재직시절은 모두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친목회, 체육활동, 여행 등 계절마다 잊지 못할 추억이 많았지. 다른 학교와의 친선 배구시합을 위해서 방과 후 함께 손을 맞추어 연습을 할 때 우리들은 승패를 떠나 모두 한 마음이 되었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건 아닌 손으로 닦으며 주전자 채로 물을 마시고, 석양이 질 무렵에는 그을린 얼굴을 쳐다보면 서로 씩 웃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네.
더 잊혀지지 않는 것은 분필가루를 씻어 넘긴다는 핑계로, 일과 후면 약속이나 한 듯 송죽극장 앞 <풍년집>에 모여 초라한 반찬을 앞에 두고 긴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들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고 생각되네. 식사 좌석에서의 앞뒤도 없는 화제는 재미는 있었지만 친구는 늘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었고, 역사적 인물이나 인근 지방의 누구 하면, 그 족보나 인맥을 꿰고 있었으니 ‘박람강기(博覽强記)’라고나 할까.
또 친구는 대구의 중심가인 중앙통에만 나오면 꼭 서점에 들르곤 하였는데, 나올 때는 언제나 손에 읽을 책이 들려 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친구의 그 습관을 배워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편이네.
청구에서 헤어져 지내는 원화여고, 대륜고등을 거쳐 청구공전(靑邱工專)으로, 나는 경리, 회게, 실무 경험을 익힌다고 <(주)대성건설>을 거쳐 <(주)대한케미칼>로 진로를 각기 달리 했으니, 그 묘한 인연은 또 다시 상서여상(尙書女商)에서 3학년을 담임하는 동료교사로 만나게 되었지.
때로는 다른 동료교사들과는 어울릴 시간이 없어서 오해를 받을 만큼 우리는 언제나 단짝이었고, 당시 친구는 문학평론가로서 대구방송국에서 <문학 작품 속의 여인상>을 1년 반이나 교양강좌를 하였으니, 바쁘기도 하였지만 그 진가가 드러나면서 주위로부터 부러움과 시샘도 많이 받은 것으로 기억되네.
또 우리는 각자 주간에도 근무처를 가지고 고3 졸업반(야간부) 담임을 함께 할 시기에 유류파동으로 방학이 짧아진다고 하여 학생들은 좋아했지만, 어려운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나는 서울로 취업할 생각을 하고 고3 담임의 마무리에 대해서 매우 갈등을 느끼던 시기였네. 서울에 제법 큰 무역회사로 전직할 좋은 기회가 왔으나, 졸업반 담임으로서 무책임하게 떠날 수는 없어 갈등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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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리목월상시상식에서 허영자 시인과 장윤익 문학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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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고민은 친구가 해결해주었지. 내 손을 잡으며 “내가 담임 업무를 대신 뒤처리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올라가라. 나는 내년에 서울로 갈 것이니 서울에서 만나자.”하며 내게 큰 힘을 주었지.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겨를이 없이 뒷일을 모두 친구에게 맡기고, 12월 8일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날, 서울에 올라가 면접시험 후 다음날부터 출근할 수 있었는데, 그 졸업식날 친구를 만났을 때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네.
다음해(1974년) 신학기에 친구가 약속한대로 서울 명지여고에 부임하면서, 우리의 서울 객지생활은 시작되었지. 저녁에 만나고 싶을 때면, 약속 없이 삼일빌딩 근처 <낭만> 음식점에 가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었고, 그런 만남으로 교류범위도 넓혔었지.
장윤우 교수를 비롯한 대학교수들, 서양화가 정린, 연세대교수 이덕형, 시인 권일송, 김문성 사장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몇몇 고향친구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그 집은 음악이 좋아 우리들을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게 했고, 때로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2차로 권일송 시인의 사랑방에서 밤늦도록 환담하고 <흑산도>의 남도 분위기에 빠지면서 모두가 격조 높은 문학, 예술 이야기를 하였었지.
나는 늘 듣기만 하였기에 대화에 동참하기 위해 종로서적에 가서 관심 있는 책을 사서 읽고는 이야기를 해보면, 역시 그 친구들 모르는 것이 없는지라, 한번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라는 소설을 읽고 그 이야기를 시작하니 “그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면서도 그 작가에 대해 사족(蛇足)까지 달아주었었지.
그 다음부터는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새로운 기업체의 성공담과 숨은 인물들, 거래질서와 장부조직, 어음수표의 결제 과정 등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화제가 바뀌었고, 대화의 범위도 더 넓어졌었지.
또 한 번은 모인 자리의 흥취가 도도하여, 흘러간 노래로 흥을 돋우고 모두가 기분나는 대로 한 곡조씩 뽑는데, 나도 그 기분에 한시(漢詩) <오인절구> 중 한수를 읊었더니, 한 시인 묵객(墨客)이 “오늘 기분이 아주 좋으니, 나하고 한번만 더 읊어보자.”고 권하기에 자네와 함께 그의 집에 가니, 사랑채에 손님접대 음식상을 차려놓고 지필묵을 내놓으면서 “일필휘지로 좋은 글귀 한줄 써달라”는 바람에 깜짝 놀라 도망친 웃지 못할 일도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르네.
김문성 사장이 억척같이 삼척에서 <동양콘크리트>공장을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시절, 친구는 그 험한 강원도 산길을 여러 차례 다니면서도 군소리 한번 하지 않고, 더구나 삼척탄광의 그 위험한 막장까지 들어가 본 경험은 이제 다시 해볼 수 없는 일 아닌가.
김 사장이 토목일은 전문가이면서도 공장경영은 경험이 적은지라, 오히려 행정적으로 어려운 일은 친구가 군청에 들어가 협조를 받아 해결하였고, 회사 조직체계와 정부의 입안 및 기장(記帳)은 내가 하였지.
얼마 후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자 김문성 사장은 고향친구들을 바닷가에 초대하여 동해의 싱싱한 회와 강원도의 별미로 크게 대접하면서 성공담을 늘어놓는 치기를 보여주기도 했었지. 또 그의 농장에서 옥수수 따고 고구마 캐며 노후의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본 그때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김문성 친구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네.
인천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고, 문화부장 모직에 이어 인문대학장, 부총장, 총장으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자네의 뚝심있는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항상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도록 끄는 힘이 있었지.
내가 먼저 고향에 돌아와서 영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사무국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친구는 인천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후 금의환향하여 고향 경주대학교 총장에 취임했지. 두 대학의 총장으로서 학교경영을 해본 경험만으로도, 모교에서 자랑스러운 <영대인상(嶺大人賞)>을 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지네.
언제나 모범적으로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친구의 미덕이었듯이, 크고 많은 일들 유종의 미를 거두기 바라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