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기계는 그때 전도양양한 공장이었다. 그런 회사의 공장장 자리를 그만두고 뛰쳐나와 사업하려는 것은 남자로서의 야망 때문이었겠지만 대단한 용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편은 창업한다는 마음을 일단 접은 다음에도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였다. 공장장의 위치에서도 영업을 하고 납품을 하기 위해 출장도 많이 다녔다. 전국 8도 중에서 강원도와 제주도를 빼고는 안 다닌 데가 없었다. 그 두 군데에만 제지업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는 거래처에 가면 환대를 받았다. 한없이 친절하고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 대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오너가 되면 달라진다고 하지만, 나중에 풍남스크린이 탄탄대로를 달리게 되었을 때도 그런 자세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을 아는 사람 중에 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로 그 점이 훗날 풍남을 창대하게 키우는 원동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
출장 다니며 그 이가 보고 듣고 배운 것은, 우리가 앞으로 사업하게 되면 뭘 할 것이냐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되었다. 그래서 우선 우리의 사업 아이템에서 제지공장은 멀찌감치 제껴두었다. 세일기계 사장님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건축업, 우유대리점, 제과점 세 가지로 압축하였다.
건축업은 당시에 경기가 무척 좋아 한창 건축 붐이 일 때여서, 제과점은 큰 시동생이 했고 나도 경험해본 친숙한 분야여서, 우유대리점은 힘들고 고생되는 만큼 수입이 괜찮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돈을 가장 잘 벌 수 있는 건축업을 먼저 지웠다. 집이나 건물을 지으면 분양을 해야 하는데, 그걸 판답시고 만날 술 먹고 화투 치고 담배나 피우면서 부동산에 앉아 있는 게 싫다는 것이었다.
제과점도 제법 돈을 벌 수 있는 분야였다. 큰 시동생이 그때 서울 신림동에서 독일제과점을 하여 집을 샀을 정도로 유망한 업종이었다. 그 이는 솔깃했지만 나는 영 내키지 않았다. 우선은, 주인이 기술을 갖고 있어야지 제빵기술자를 고용하여 장사를 해서는 고전하게 된다는 것이 난점이었다. 결국 나나 그 이가 제빵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인데, 그 이는 회사를 다녀야 하고 출장도 잦기 때문에 학원시간에 맞출 수 없었고, 나로서도 아이들 셋을 키우면서는 벅찬 일이었다. 물론 무리를 하면 못할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애들에게 결코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우유대리점이었다. 어떤 아는 사람이 서울에서 실제로 사오백의 월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우리 부부가 특별한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유대리점 이 우리한테는 제일 적당한 것 같아요.”
당시에 서울우유가 병으로 나올 때였는데, 우유대리점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아는 사람을 찾아가 시시콜콜 물어보고 돌아왔다.
월수입은 그 사람 말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런데 본사에서 우유가 대리점에 도착하는 시간이 새벽 2-3시, 배달하는 사람들에게 우유를 나눠주고 그분들이 돌아와 정리하고 나면 아침 7-8시였다. 그러니까 꼭두새벽부터 아침까지 우리 아이들이 완전히 고아가 되는 것이고, 초등학교 다니는 민선, 재선이의 등교 준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개구쟁이 세용이는 꼼짝없이 내가 옆에 붙여놓고 일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애들과 가정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모저모 여러 각도로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해답이 나오지 않아 재고해볼 필요가 있었다. 퇴근을 한 그 이와 마주 앉았다.
“여보, 내가 제의할 게 있어요.”
“뭔데요?”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유대리점은 안 될 것 같아요. 애들을 이왕 낳았으면 잘 길러야 되잖아요? 그런데 우유대리점을 하게 되면 돈은 벌겠지만 애들을 몽땅 버리게 생겼어요.”
“버리다뇨? 다른 사람들은 애들 교육을 안 시키고 삽니까? 당신이라고 꼭 그렇게 유난해야 되냐구요?”
남편은 그러면서, 아이들 교육보다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때라는 둥, 돈을 벌어야 아이들 교육도 잘 시킬 수 있다는 둥,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나한테 먹힐 리 없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남편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은 식솔을 벌어 먹일 자신도 능력도 없으면서 장가는 왜 갔어요? 애들을 낳았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낳아서 애들을 제대로 기르지 못할 바엔 왜 낳았어요? 돈은 나중에 벌면 되지만 애들 교육은 한 번 기회를 잃으면 다시 되찾을 수가 없다구요.”
내 다그침에 그 이는 그만 얼굴이 굳어져 아무 말을 못했다. 나는 거기 에서 멈추지 않고 아예 발을 빼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는 안 하겠어요. 무조건, 당신이 우리를 벌어먹여요. 당신이 지금까지 닦아온 기술이 있잖아요? 그걸로 나가세요. 혼자 벌어서 우리 식구를 벌어먹여야지, 당신은 뭐든지 나랑 같이 할 것만 생각하세요? 날 지금까지 부려먹고도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애들까지 떼어놓고 나보고 하라는 거예요? 나하고 같이 뭘 할 생각하지 말고 당신 혼자서 책임지라구요!”
“……”
내 호통에 그 이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소리도 못했다. 그러더니 며칠 후 나에게 말했다.
“여보, 알았어요.”
남편이 나와 같이 무슨 일을 하려던 것이 나를 부려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아내와 같이 하게 되면 실수가 적고 손해를 줄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알고 있었지만 남편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서 일부러 되지도 않는 큰소리를 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제대로 효력을 발휘했는지 그 얘기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그 후에 안 사실이지만, 아마도 그때부터 남편은 나한테 아무 상의도 없이 혼자서 사업 구상을 계속해 나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