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하고 영세를 받았지만 그때까지 견진성사는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 세용이를 낳고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 후에야 비로소 대부 대모님을 정했는데, 심곡동 농협의 분소장으로 일하는 분을 대부님으로 모셨다. 동네 유지로서 굉장히 해박하시고 존경스러운 분이었으며, 대모님 또한 부창부수로 자애롭고 현명한 분이었다.
대부 대모님께 남편의 사업에 대해 의논드리면서 도움을 청했다. 두 분은 자기가 잘할 수 있고 잘 아는 일을 해야 한다면서 기꺼이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루시아, 네가 지혜로우니 잘할 게야.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라.”
“예, 고맙습니다. 대부님.”
그리고 83년 말이었다. 남편은 고오석 사장님에게 12월까지만 근무를 하고 창업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사장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남편은 즉각 공장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저축해 두었던 것을 모두 찾아 3천 8백만 원을 준비하였다. 사업 아이템은 금속 가공업으로 정했다. 제조업도 생각해 보았지만 무엇보다도 자재와 인건비 부담이 만만치 않고, 만약에 부도라도 맞으면 타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가공업을 선택한 것이다. 가공업은 인력도 많이 필요하지 않은데다가 만일의 경우 인건비 정도만 손해 보면 되기 때문이었다.
금속가공 업체들이 몰려 있는 서울 문래동에 31평짜리 공장을 얻었다. 가공기계는 한국금속에서 2억 원짜리를 할부로 구입할 수 있었다. 시가보다 싼 값에, 그것도 모두 현금으로 지불해야 할 것을 할부로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금속의 회장님과 남편이 특별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세일기계 공장장 시절, 회장님이 잘 보셔서 아들 삼자고까지 했던 관계였다. 그 이는 실력도 있었지만 성격 자체가 좋아서 한 번 거래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호감을 가지고 기꺼이 도와주곤 했다.
세일기계 고 사장님은 공장의 보증금을 도와주셨다. 남편에게 너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를 사고, 6개월 동안 월세 낼 수 있는 자금만 빼고는 몽땅 공구를 샀다. 그리고 여사무원을 구한 다음, 마침내 1984년 4월 28일 <풍남기계>가 닻을 올렸다.
여사무원이 앉으면 사장님 앉을 자리가 없고, 사장님이 앉으면, 여사무원은 옆에 서 있어야 할 정도로 곤궁한 살림살이였지만 사업가 박노광의 야망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자재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조그만 트럭을 큰 시동생이 사주었다. 그때 시동생이 신림동과 연신내 두 군데에서 제과점을 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큰 선물이어서 고마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풍남기계의 실력과 성실함이 입소문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일감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것을 처음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한 번 바퀴가 구르게 되면 큰 힘을 주지 않아도 굴러가는 것처럼, 공장은 천천히나마 순탄하게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직원이 확인한 것도 자기가 직접 다시 재봐서 확인해야만 안심을 하고, 납기일만큼은 세상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철칙 덕분이었다.
그렇게 성심성의껏 일을 함에 따라 조금씩 돈이 모아졌다. 하지만 남편은 허리띠를 결코 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정해 놓고 먹는 식당에 직원들을 보낸 다음 자기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라면을 끓여먹었다. 운동화 두 켤레에 작업복 두 벌로 2년을 버틸 정도였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집에 와서 참으로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여보, 내가 오늘 좀 큰 거래처를 갔는데 회사 경비원이 안 들여보내 주는 거야. 그래서 안에 전화를 해서 전무님 허락받고 간신히 들어갔어요.”
경비원이야 잠바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은 사람이 고물 트럭을 몰고 왔으니 잡상인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할 바를 다한 것이겠지만, 사람을 겉차림만 보고 대접하는 풍토가 너무나 슬펐다.
“당신, 내가 내일 당장 양복 맞춰드릴 테니까 이제는 양복 입고 다니세요. 출장가실 때도 넥타이 매고 구두도 신으시구요. 그리고 승용차를 사드릴 테니까 앞으로는 트럭 몰고 다니지 마세요, 아셨죠?”
그래서 남편에게 처음 사준 차가 프레스토였다. 양복도 맞춰주어서 입고 다니게 했고, 회사 밖을 나갈 때면 항상 구두도 갖춰 신도록 했다.
“여보, 당신도 이제 이런 양복 입고 다닐 자격이 있어요.”
본디 체격이 좋은 남편에게 양복을 입혀 놓으니 대기업 사장님 같아서 나는 흐뭇했다. 옷이며 구두며 양복 같은 것에 도통 관심이 없는 양반이어서, 평소 입던 옷을 양복점에 가져가서 대충 초벌 양복을 만든 다음, "우리 바람 쐬러 갑시다" 하고 슬쩍 같이 나가 가봉을 하는 식이었다.
평생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꾸는 걸 싫어했던 사람, 그러나 아내에게 해주고 가족에게 베푸는 일은 서슴지 않고 기꺼이 해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들이를 하더라도 같이 나가는데 부부지간에 어느 정도는 조화가 되어야 하기에 양복을 맞추라고 졸라대지만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평생을 자신감에 가득 차 살았기 때문이었다. 자기는 체격도 이만하면 준수한 편이고 멋있는 편이어서 못생겼다고 생각한 적도 없으며, 어딜 가나 일을 하건 돈을 벌건 간에 자신 없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는 머리가 허연 대로 염색도 하지 않았고, 차림새도 중요시하지 않고 항상 털털했다.
“거, 옷 잘 입고 멋 부리는 건 다 못난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구요.”
남편이 그런 말을 하면 나는 찔려서 이렇게 대꾸를 하곤 했다.
“그래요, 당신 부인은 못생겨서 감추려고 포장하고 다녀요.”
“천만에! 당신은 내가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부인이니까 예외!”
그 무렵, 세일기계에 같이 다니던 김종원 씨와 이상옥 씨 부부가 우리의 첫 대자 대녀가 되었다. 이상옥 씨는 막내시동생의 친구여서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김종원 씨는 세일기계에 들어가 알게 되었는데, 두 사람이 남편과 친하게 지내 입교도 우리가 시켰고, 첫 대부 대모도 우리가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이상옥 씨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황해기계>를 창업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업 자금이 부족하여 남편의 공장 한쪽에 기계를 들여놓고 일할 수 있도록 세를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