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이 되어, 풍남은 2년 동안 밤낮없이 일을 하여 돈을 제법 모을 수 있었다. 이제는 무엇보다 공장을 옮겨야 했다. 날이 갈수록 일감도 많아졌지만 덩치 큰 일을 맡으면 그 작은 공장에서 작업하는 게 무리였고, 출퇴근 시간이 너무 긴 것도 문제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멀더라도 공장 확장이 급선무여서 처음에는 공장 근처를 알아보았다. 거래처 사람들이 찾아오는 데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장 크기가 마음에 들면 자금이 모자라고, 돈에 맞추다보면 너무 규모가 작았다. 금속 가공업이기 때문에 일정 규모가 필요하고 소음이 발생하여 서울 시내에는 갈 만한 곳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곳은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달리는 만큼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인천이었다. 서인천 쪽에는 공업단지도 많이 형성돼 있었고, 서울에 비해 상당히 쌌으며 교통도 좋았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수입·수출을 하는데도 그렇고 무엇보다 심곡동 집에서 가까워서 적격이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인천이 좋았다. 인천 태생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성장한 곳이니, 나한테 인천은 생각만 해도 평화스러운 곳이었다. 어딜 갔다가도 동인천역에 도착하면 내 집처럼 친근하고 마음이 평온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회사를 인천으로 옮긴 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인천의 입지 조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장을 서울 문래동에서 인천으로 옮긴 것 때문에 시집 식구들의 오해 부분도 있었다. 왜 하필 인천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푼이라도 아끼고 절약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던 당시에, 남편의 관심이 오로지 넉넉지 않은 자금으로 어떻게 하면 큰 공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인천 석남동에 있는 제재단지에는 목재와 관계된 업체만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제재업을 하고 있던 한 업체가 자기네공장 부지의 반을 매물로 내놓았고, 풍남은 그 공장부지 500평을 사게 되었다. 31평에서 시작하여 500평으로 늘렸으니 대단한 발전이었고, 이제 공장 건물만 세워지면 덩치 큰 일감도 척척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새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남편은 문래동 공장에 가서 오전만 잠깐 일을 하고, 오후에는 거의 공사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큰일부터 자질구레한 일까지 하나하나 결정해 줘야 할 일이 많았지만, 공사 현장을 보기만 해도 어찌나 좋은지 싱글벙글, 허허허 하며 살았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잘해주고 저녁마다 그날 공사를 마감하면 술대접을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음주운전을 하게 되었고, 나와 분란이 안 생길 수 없었다. 그런데 워낙 술을 좋아하는데다가 기분까지 넘치게 좋으니, 안 하겠다고 한 약속이 이틀을 못 가는 것이었다. 대판 싸움을 수없이 벌이고 심한 말을 퍼붓고 하여도 여전하였다. 싸우는 것도 두세 번이지, 나중에는 내가 지쳐서 말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그러던 차에 결국 우려하고 걱정하던 음주운전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경찰서 입니다. 박노광 씨 아시죠?”
“예, 저희 애 아빠인데요.”
“예, 지금 음주운전으로 경찰서에 와 있습니다.”
한달음에 경찰서로 달려가자 남편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앉아서 취조를 받고 있었다. 음주운전을 하고 오다가 택시와 접촉사고를 냈고 술먹은 김에 시비가 붙었는데, 택시기사가 그만 신고를 하여 붙잡혀 온 것이다. 그런데다가 경찰서까지 와서도 큰 소리로 따지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는 그때까지도 술이 안 깬 상태였으니, 내 입에서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었다.
“이 양반 맨날 술 먹고 이래요. 벌 좀 많이 주세요.”
나나 남편이나 법을 어기고 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경찰서가 무엇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음주운전을 하면 무슨 벌을 받는지도 모를 때였다. 내가 웃으면서 장난조로 말을 하자 형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아주머니 웃으시네요. 나중에 울고 오지 마세요.”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리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취조가 끝나자, 남편을 사무실 한 켠에 있는 철창으로 끌고 가더니 '드르르륵' 창살을 열고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 바로 그게 말로만 듣던 유치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런데도 난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어머, 술 먹은 것 가지고도 저런 데 가두나!’
음주운전을 하면 구속되어 형을 살게 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철창에 갇힌 남편을 보자 겁이 덜컥 났고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일어난 상황은 더욱 참담했다.
남편은 영장이 떨어져 검찰청을 거쳐 인천구치소에 수감되었고, 나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택시기사와 합의를 보는 한편 구명운동을 펼쳤다. 그렇지 않아도 공사 때문에 쪼들리는 형편에 합의금을 마련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가슴을 졸이는 바람에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나뿐만 아니라 한남선 총무도 결재서류를 들고 경찰서로 검찰청으로 구치소로 쫓아다니느라 고생을 했고, 시어머니에게는 걱정을 끼칠까봐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뛰어다니는 동안 친정어머니도 우리집에서 아이들을 보살피시느라 심신이 무척 피곤하셨다.
인천구치소에서 꼬박 14일을 살고 마침내 영어의 몸에서 풀려났다. 작은오빠가 자가용을 가지고 구치소 앞에서 기다렸고, 저녁에 그이가 나오자 친정어머니는 미리 사온 두부를 사위의 입에 밀어 넣어 주었다.
집에 온 남편은 아랫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보, 여기 앉으세요.”
나는 형사에게 “벌 좀 많이 주세요”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은근히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 말 때문에 그렇게 사건이 일파만파 커진 펀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는 정반대로 무릎을 꿇고 앉더니 내 손을 잡았다.
“여보 당신 고생 많으셨죠. 내가 너무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술 한잔이라도 마시면 절대 운전대를 안 잡겠습니다.”
“여보, 죄송해요. 그렇게 형을 살게 되는 줄도 모르고, 잠깐 하루 이틀 고생만 좀 하다가 나오는 줄 알고 그랬는데…… 당신이 하도 술 잡숫고 운전을 자주 해서 그걸 좀 막아 보려고 그랬던 건데, 그렇게 크게 번질 줄은 몰랐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녜요, 그 14일 동안 정말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고 왔어요. 당신이 아니면 누가 나한테 그런 공부를 시키겠습니까? 당신 덕분에 내가 이렇게 공부 잘하고 왔습니다. 너무 고마워요.”
나는 그 말이 절절히 진심이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가 인성을 제대로 갖춘 사람, 존경할 만한 남편이라는 사실을 새삼 또 깨달았다.
‘아, 역시 내가 잘못 보지 않았구나!’
그 후 남편은 다시 공장 짓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밖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아무튼 풍남기계는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공장을 완공하여, 마침내 86년 7월에 석남동 공장으로 완전히 이전했다. 바야흐로 풍남기계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