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중기는 기계제작 분야에서 대기업이다. 풍남기계가 석남동 공장으로 이전하면서 가장 기쁜 소식은 금성중기의 하청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협력업체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고,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굵직굵직한 일거리를 계속 수주할 수 있으며, 대금 결제를 잘 받음으로써 안정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한 대기업의 신뢰를 유지하려면 또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남편을 불철주야 몸이 부서져라 하고 뛰어다녔다. 거래처 출장을 갈 때에도 남들이 자는 시간인 밤 10~11시에 떠난다. 밤새도록 차를 달려서 새벽 4~5시 도착하면 여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그 회사 출근 시간에 맞춰서 방문하여 업무를 본다. 하루 종일 몇 군데씩 돌아다니며 일을 보고는, 또 밤 시간을 이용하여 차를 몰고 새벽에 집에 도착한 다음 잠시 눈을 붙이고 아침 출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남편은 철두철미 사업가 정신으로 무장돼 있었으며, 잠시도 자신을 나태하게 놔두지 않는 매우 특별한 분이었다.
금성중기에서 하청을 받는 협력업체들의 모임인 금성중기협의회에도 가입을 했다. 협의회 책임자는 안산시에 큰 공장을 갖고 있는 한국열처리 사장인 이희영 회장님인데 사모님이 일본 분이었다. 그리고 부회장님은 미진공업사의 김형배 사장님이었는데, 두 분 다 인품이 훌륭하고 박식하면서 안목이 넓어서 많은 분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남편도 그분들에게 유용하고 훌륭한 조언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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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중기협우회' 정기총회 및 '90 송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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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기계는 금성중기협의회에서 신참에 불과하여 다른 회원사와 비교하면 하청 받는 일이 물량도 적고 규모도 작았지만, 풍남기계가 그때껏 해왔던 일과 비교하면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대단히 정밀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풍남기계의 직원 수도 40명 수준으로 대폭 늘어났고, 회사는 매일매일 바쁘게 돌아갔다.
직원이 늘어나면서 공장 안에 직원식당을 만들었다. 식당이 생기면서 김치 ·깻잎 ·콩자반 ·멸치볶음 같은 밑반찬을 만들어 대는 일이 나에게 주어졌다. 그 많은 인원에게 하루 두세 끼 분의 반찬을 제공해야 하니 밑반찬을 해보내야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창설(?)된 것이 '풍남 김치부대' 였다.
김치부대의 핵심요원들은 우리 부부가 천주교 입교를 시킨 대녀들이었다. 거기에다 심곡동에서 친하게 된 교우들과 동네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열댓 명 되는 분들이 김치를 비롯한 밑반찬을 해댔다. 나는 그분들에게 일만 시키는 것이 아니고 맛있는 것을 이것저것 만들고 사서 제공했다. 잘 먹고 잘 놀면서도 음식 솜씨들도 좋고 손이 재빨라서 항상 즐겁게 일을 했다. 마늘이나 고추도 까고 다듬고 빻아서 공장식당으로 보냈다. 품질은 항상 최상급이었다. 우리 가족이 먹고, 부대원들이 먹고, 내 식구처럼 생각하는 직원들이 먹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동생 부부도 풍남에 취직을 시켰다. 기술도 다양하고 재주는 많은데 이것저것 하다가 실패만 거듭하던 제부는 공장 일에 바로 투입되었고, 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동생은 식당일을 책임지게 되었다.
밑반찬 대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일을 했다. 남편도 그런 뒷바라지에 힘입어 영업활동에 총력을 기울였고, 풍남기계는 순풍에 돛을 달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공장 규모도 커지고 직원들도 많아졌는데 남편은 영업하기에도 바빠, 세일기계에서 일하고 있는 김종원 대자를 공장장으로 스카우트해 왔다.
남편이 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 부부가 세운 원칙 가운데 하나는 무슨 약속이든지 반드시 지키자는 것이었다. 납품일 같은 것은 물론이고, 무슨 시간 약속을 했으면 가서 기다리게 되더라도 미리 가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지키라고 부탁한 것은 돈 약속이었다.
“사람들이 외상이나 물건 값을 받으러 오면 보통 '다음에 오세요, 오늘은 없으니까' 하고 몇 번씩 허탕 치게 만드는 거, 저는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우리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러지 맙시다. 작은 돈이라도 빚을 얻어서라도 약속은 꼭 지키세요.”
약속을 받은 사람은 기대를 걸고 찾아온다. 그런데 이쪽에서 약속을 어기면 돌아가는 길에 욕을 하겠지만, 약속을 지키면 그쪽에서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고맙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받게 되면 안 될 일도 되지만, 욕을 먹으면 되는 일이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러한 마음으로 합일이 되었고, 나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여보, 내가돈은 얼마든지 얻어댈 테니 약속은 꼭 지키세요. 알았죠?”
그동안 나는 언제 어디에서든 항상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무척 애를 써 왔다. 봉사 활동을 하고 하루 종일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내가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고 신경 쓰는 게 이자 날짜였다. 그래서 이자날짜가 되기 전에도 잊어버릴까봐 하루나 이틀 전에도 가져다주었고, 밤이 되었더라도 불쑥 생각이 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갖다 주곤 하였다. 그렇다고 늘 가진 돈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이어서 보통 피를 말리는 일이 아니었다. 사업하는 사람의 아내의 삶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나는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신뢰를 쌓고 산 덕분인지 아쉬운 얘기를 하면 주변에서 아무 소리 없이 바로 빌려주었다. 나중에는 한동안 돈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한테 이렇게 물을 정도가 되었다.
“루시아, 돈 안 써?”
하지만 나는 돈을 꿀 때면 ‘이제 앞으로는 절대 남의 돈 안 꾸어야지’ 하고 결심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는 동서의 돈까지 얻어주곤 하였다. 오지랖이 넓은 건지 푼수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틀림없는 건 지금까지 남편의 사업을 도우면서, 그리고 여태까지 살면서 남의 돈을 빌려서 실수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깊은 은총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