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바스켓>이란 종이 만드는 과정에 필요한 기계인데, 종이를 만들 원재료 중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체 역할을 하는 장치다. 불순물을 얼마나 잘 걸러냈느냐에 따라 종이의 품질이 결정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부품이다.
그런데 1988년 당시만 해도 그렇게 중요한 스크린 바스켓은 모두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기술이 없기 때문이었다. 국산화에 매달리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제지 업계에서는 유명한 최 모 교수라는 분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남편은 평소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열리는 기술전시회에 자주 갔다. 혼자서도 갔지만 나하고도 같이 많이 갔는데, 그때마다 스크린 바스켓을 눈여겨보았다. 그 이가 제지공장에 있을 때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였다.
당시 스크린 바스켓을 생산하는 회사는 캐나다의 CAE가 가장 컸고, 미국의 <블랙 크라우슨>과 독일의 <휘들러> 사 등 3개 회사가 전 세계 스크린 바스켓 시장을 100% 점유하고 있었다. 특수 제품인 데다가 거의 독과점이니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어서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하지만 국내 제지회사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꼬박꼬박 고가에 사서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이는 그 점에 착안했다. 스크린 바스켓을 우리 기술로 만들게 되면 가격도 낮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시장은 물론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시장까지 넘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때는 풍남기계가 어느 정도 제 제도에 올랐을 때이니 변신이 필요하였고, 국산화를 통해 외화도 절약하여 애국할 수 있다는 국가관의 발로 이기도 하였다.
남편은 최 교수님을 만나 '스크린 바스켓' 개발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연구개발비 전액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우영 교수님도 연구팀에 합류하였다. 지금은 기술교육 분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국기술교육대학교(천안 소재)가 태동하려던 무렵이었는데, 두 분 다 그 대학의 설립 추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박노광이 스크린 바스켓 개발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지회사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제지회사들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개발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제지업계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금형을 하는 사람이 개발한다고 나섰으니 백 명이면 백 명 전부가 안 된다고 생각했고, 친한 분 몇몇은 적극적으로 말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동안 전문가들도 무수히 실패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실패하지는 않겠지만 성공 또한 기대할 수 없다’ 는 것이 그 이의 기본 행동철학이었다.
주위에서 비웃음과 만류가 심할수록 남편은 스크린 바스켓의 개발에 더욱 매달렸다. 두 분 교수님 또한 남편이 연구개발 지원에 전혀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은 것에 더욱 고무되고 감동을 받아 밤잠을 아껴가며 연구에 매달렸다. 만들고 실험해 보고, 만족스럽지 않으면 내던져 버리고 다시 만들었다. 기존의 수입 스크린 바스켓보다 품질이 월등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비슷하기는 해야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으니 더욱 그랬다.
그 무렵 남동공단 15B-2L의 공장 부지를 매입하였다. A사장이 분양받은 공장부지 1,000평의 반을 산 것인데, 그쪽 사정 때문에 부지의 명의를 남편 이름으로 하지 못하여 A사장의 부친 소유인 계양산 땅을 담보로 잡아두었다.
남동공단의 공장 부지는 스크린 바스켓 생산 공장을 염두에 둔 풍남의 야심찬 사전 준비였다. 그런데 얼마 후 A사장이 갑자기 부도를 맞고는 종적을 감춰 버렸다. 명의도 남편 것으로 돼 있지 않으니 가만히 있으면 아얏 소리도 못하고 500평 공장 부지가 그대로 날아갈 판국이었다. 결국 권리를 유지하려면 그 1,000평을 모두 인수해야 했으니, 우리가 본래 샀던 500평은 대금을 두 번 내는 셈이었다. 음주운전 사건 때문에 빚을 얻어대느라 그 고생을 했는데 또 돈을 꿔야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게다가 500평 땅 값은 이중으로 대금을 지불해야 하니 겹겹이 쌓이는 심적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계양산 땅을 담보로 잡고 있어서, 나는 그걸 처분할 것을 남편에게 의논하였다. 돈을 빌려대는 건 내가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루쯤 지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여보, 그분 아버님이 땅을 평생 노력해서 샀을 것이고 그동안 그분한테 큰 힘이 돼 주었을 텐데 우리가 덜컥 가져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이 잘못하신 거라면 막무가내로 가져와도 되지만, 아들이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아무리 부자지간이라지만 아들이 잘못한 일을 아버지보고 책임지라는 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걸 가질 수가 없어요.”
과연 내 남편답고 공사 분명하고 공명정대하고 '박노광'다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나도 양심상 할 말이 없어서 꼼짝없이 계양산 땅문서를 돌려주었고, 그 땅을 사느라고 빚을 얻어대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500평 값만 있으면 살 수 있었던 것을 1,500평의 돈을 들인 셈이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 사건이 풍남기계로서는 첫 번째 시련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쯤 뒤,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우연히 진주가게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그 A사장과 딱 맞닥뜨렸다. 그분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새파래졌다.
남편이 그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사장님, 지난 일은 거론하지 않을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그때 상황이 오죽했으면 여기까지 오셨겠습니까. 다 과거 일이니까 잊어버리십시오.”
그분은 남편의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마도 그 당시 상황이 다급해지니까 우선 몸부터 피하기 위해 한국 땅을 떠났겠지만, 그동안 온갖 후회와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고통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남편은 그런 고통으로 죗값을 치른 걸로 하겠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그분이 선물한 진주가루 두 통을 갖고 말레이시아를 떠나며 “사람, 정말 죄 짓고는 못 사는 거야”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