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이었다. CAE의 카리 씨가 갑자기 내한하여 합작회사에 대한 말을 꺼냈다. 그래서 실사까지는 안 갔지만 서로의 의견을 상당히 접근시키는 수준까지는 진전을 보았다.
CAE는 원래 비행기 조종사를 교육시키는 항공시뮬레이션 기기를 제작, 판매까지 하는 대기업이다. 그러니까 제지회사는 아주 조그만 계열사에 불과했는데, 제지공장이 캐나다와 핀란드 두 곳에 있었고 카리 씨는 핀란드 쪽 책임자였다. 그래서 미주 지역과 유럽 쪽 시장은 장악하고 있었는데 아시아 쪽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시아 시장을 한국의 풍남이 장악해 가고 있으니 비상이 걸렸다. 자기네 제품이 아시아에서는 자꾸만 밀리고 있으니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때 풍남을 비롯하여 아시아에서는 대만의 인찌라는 회사와 인도네시아에 있는 모 회사까지 셋뿐이었다. 그중 인도네시아 쪽은 무시해도 될 정도였고, 인찌는 스크린 바스켓 전분 제작회사인 미국 블랙크라우슨에 OEM으로 전량 납품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찌는 풍남에 비해 시설도 낙후돼 있었고, 제품의 회선을 감는 방식 이 조립식으로 CAE 것과는 달랐다. 이에 비해 풍남은 우선기술이 있었고, 회선 감는 방식 같은 것도 CAE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제작 의뢰를 하면 풍남에서는 CAE 제품을 만들기가 쉬웠다. 그래서 기술제휴를 맺었고 2공장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1999년 어느 날 CAE의 부회장이란 사람이 뜬금없이 풍남을 찾아와서는 남편에게 어처구니 없는 제의를 하였다"
“풍남을 우리한테 파시오!”
남편이 사업을 그만두게 되면 풍남을 CAE에 파는 조건으로 계약을 갱신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노우!"남편은 자식들한테 물려줄 거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게 해서 1999년에 CAE와의 기술제휴가 끝났고, 카리 씨는 부회장이 그런 제의를 할 줄 몰랐다면서 무척 서운해 하면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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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직원들과 CAE 기술연수 및 답사를 가서(2000년, 핀란드 CAE본사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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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크린 바스켓은 캐나다의 CAE, 미국의 블랙크라우슨, 독일의 휘들러 순으로 세계시장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CAE와 경쟁 관계에 있는 독일의 휘들러 측에서 합작회사를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풍남 쪽에서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더 앤더슨이라는 컨설팅 회사가 나서서 풍남의 가치평가 등의 실사에 착수했다. 나중에 긴밀한 관계가 이어지지만, 염남수 이사님은 그때 컨설팅 책임자로 풍남을 담당하신 분이었다.
실사를 하는 1년 동안 독일을 오가며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 휘들러 쪽에서는 부사장이 회의를 주도하였는데, 그분의 합리적인 제의에 합작회사 작업은 긍정적으로 순항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결과가 나오고 휘들러 쪽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그동안 협상을 주도했던 부사장 대신 사장이 내한하여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사장이, 그때까지 부사장이 제시해 왔던 조건과는 너무나도 다른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바람에 합작은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다.
그런 와중에 스크린 바스켓 코팅 작업과 필터 노즐 개발 작업을 위해 마련한 2공장은 1공장과 떨어져 있다 보니 관리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불거졌다. 그래서 황해기계를 하고 있는 이상옥 대자에게 부탁하여 2공장 관리를 맡겼다.
그런데 2공장을 3, 4년 운영해 보니 거리도 있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때마침 이상옥 대자가 나가서 황해기계를 다시 중흥해보겠다는 의사를 전해와, 2공장 문제를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공장이 큰 게 있다면 거기에 모두 모여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항상 큰 공장 하나 갖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여보, 아무래도 공장이 좁아서 큰 데로 가야겠어요. 내 생전에 번듯하게 하나 지어서 애들한테 물려줘야지 않겠어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합니까? 회사는 작은 데서 돈을 버는 거예요.”
내 역할은 그렇게 끊임없이 개혁을 추구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꾀하는 남편을 다독거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음해인 2000년에 다시 CAE에서 연락이 와서 합작을 제의했다. 남편은 즉각 거절했다.
“나는 회사를 팔 생각이 없다니깐”
그러자 카리 씨가 내한했고, 남편과 진지하게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 사이에 다시 휘들러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OEM방식으로 계약을 맺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CAE측과 협상이 진행 중이어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