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핫바지와 경기도 깍쟁이의...

내가 그 이를 만난 것은 17살 때였다. 서울 통의동에 있는 친척 언니네 가게의 점원으로 일할 때였다. 나는 명색이 그 가게의 경리였고, 그 이는 우리와 거래처인 화성상회의 점원으로 일했다.

그 가게는 지금으로 치면 대형 슈퍼마켓쯤 되는 잡화점이었는데, 형부네는 그것 말고도 빙 둘러 가게를 8개나 더 갖고 있는 데다가, 택시와 버스를 10여 대쯤 굴리는 큰 부자였다. 그런 부잣집 에서 나 같은 꼬맹이를 경리로 쓴 것은 언니네가 우리엄마 쪽으로 친척 간이었고, 내가 어릴 때부터 세파에 시달렸던 탓인지 그래도 제법 야무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니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조금씩 이나마 월급을 받아서 집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언니네 집에는 가게 점원들과, 버스와 택시 기사들에 조수와 정비사까지 합쳐서 식구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 시대에는 대개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교통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집이 먼 사람들도 거기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 밥과 빨래를 해대는 집안일하는 사람만도 서너 명이나 되니 말 그대로 대식구였다.

나는 낮에는 가게에서 일을 했고, 밤이면 집에 들어와 언니 아줌마들과 함께 부엌일과 집안일, 빨래하는 일을 도왔다. 물론 여자들은 다들 그랬지만 나는 특히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재빠르게 놀려 어른들의 예쁨을 받았다.

언니는 부잣집 마나님답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항상 곱게만 하고 살았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매일같이 미장원에 가서 머리만지는 게 일이다시피 했고, 언제 어느 곳에서도 우아한 폼을 잃지 않는 공주라고나 할까……. 이제 칠순을 넘은 언니는 형부가 갑자기 운명하시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지금은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 이는 중학교 3학년 때 가방을 맨 채로 논산 집에서 가출을 하였다. 학비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형편이니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부산에 형편이 좋은 친척이 있으니 그리로 갈 작정으로 대전역까지 가서 무작정 도둑기차를 탔다. 차비가 없어서 몰래 석탄을 때는 칸으로 숨어들어가 부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사히 부산에 도착하긴 했는데, 온몸에 석탄이 묻고 연기에 절어 눈과 이빨만 하얗게 보일 뿐 온통 시커메서 볼 만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시 서울 이모님네로 올라왔고, 인천 작약도 섬에 있는 이모님네 매점에서 종업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의 통의동 화성상회에 취직을 하여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화성상회는 수입품 판매를 하는 가게였다. 그래서 그 이는 자전거에 음료수 박스를 높다랗게 싣고 통의동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는데, 거래 관계로 우리 가게에 자주 들렀다. 키가 크고 체격도 좋고 잘생긴 편이었다.

나도 가끔 수표를 바꿔야 하는 등의 심부름으로 화성상회를 들락거렸다. 이따금 보면 그 이는 말이 없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그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학구열에 불타 주경야독을 게을리 하지 않는 건실한 청년이었다.

그러던 6월 어느 날이었다. 그 이가 우리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여느 때처럼 말없이 고개만 꾸벅하고는 전표를 내밀었다. 나는 물건과 금액을 확인하고는 도장을 찍은 다음 “여기 있어요.” 하면서 되돌려 주었다. 그런데 내 착각이었는지, 전표를 받는 그 이의 손길이 가볍게 떨리는 것이었다.

그 이는 그날따라 더딘 동작으로 그걸 접더니 품 안에 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바빠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잠시 쭈뼛거리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앞으로 디밀었다. 쪽지였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돌리고 괜히 책상 위의 노트를 들척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뭔진 모르지만, 저 이런 거 안 받아요."
"별것 아녜요."

그 이는 나직하게 말하더니 책상 위에 쪽지를 놓고는 또 말없이 고개만 꾸벅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며 얼른 쪽지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쪽지를 가지고 있던 30분 동안 얼마나 떨리던지…….

간신히 가슴을 다독거리고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가게를 나와 쪽지를 펼쳤다.
'한 번 사귀어보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 8시에 적선동 은행 앞으로 나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다시 가슴이 통통거리고 왈칵 겁이 나면서 몸이 떨려 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것이었다.

그날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무척이나 오락가락하다가 약속장소에 갔다. 그냥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서 은행 기둥에 기대섰다. 그렇게 간신히 몸을 버텨가며 서 있는데 드디어 저쪽에서 그 이가 자전거를 타고 휙 나타났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 다다라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내 쪽을 바라보며 그냥 서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고백한 일이지만, 그이도 너무나 떨려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몇 분이 흐르자, 이윽고 자전거를 끌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