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의 떨리는 목소리에 쫓겨나도 얼른 고개를 꾸벅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어렵게, 대단히 어렵게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제가 쪽지에 말씀드린 것처럼, 정순 씨하고 한 번 사귀고 싶어서 나오시라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승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순'이는 창례라는 이름이 싫어서 스스로 만든 가명이었다. 나는 예상했던 말이어서, 내내 생각했던 말을 조심스레 풀어놓았다
"인천 저의 집에 혼자되신 어머님이 오빠들과 살고 계신데, 제가 이렇게 와 있는 것만 해도 어른들한테 큰 걱정을 끼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어머님의 의도를 저버리고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잠시 후 그 이가 말했다
"그러시다니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알겠습니다. 부모님 말씀을 따르셔야죠. 자,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리고는 자전거를 타더니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달려갔다. 나도 이내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데, 더 이상 추근대지 않고 깨끗이 돌아서는 걸 보고 '사내답구나' 하는 생각과 아쉬움이 남았다.
그 후로도 그 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 가게를 드나들었다. 나 또한 거래상 화성상회를 자주 갔다. 나는 그 이를 볼 때마다 좀 쑥스러웠는데, 어느 날 엉뚱한 일이 터졌다.
한 정비사 총각이 비쩍비쩍 마르고 잠을 제대고 이루지 못하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연모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밤에 식은땀을 흘리면 헛소리를 하고 가위에 눌려 비명을 지르곤 한다는 것이었다.
형부와 언니가 나서서 이런저런 말로 위로를 하고 단념 시키려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궁리를 하다하다 못한 두 분이 나를 안채로 불렀다.
“창례야, 큰일 났다. 저 사람, 저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하냐? 그래서 형부랑 상의를 해봤는데, 아무래도 방법이 없네. 네가 자기 눈에 안 보이면, 첨엔 좀 힘들겠지만 아마 잊어버릴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네가 집이든 어디로든 잠시만 피했다가 오는 게 좋을 같다. 어떠냐?”
“제가 생각해도 그 방법밖에 없네요, 언니.”
나로서도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마침 그날 그 이가 가게에 들렀고, 은밀하게 말을 건넸다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저녁에요? 알겠습니다.”
그 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기가 번져 나가는 걸 보았다. 하지만 내가 만나서 할 얘기는 그리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왠지 그런 식으로라도 한 번은 만나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근처 가로등 아래에서 만났고, 나는 좀 망설이다가 전후 사정 얘기를 했다. 내 말을 잠자코 들은 그 이는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가로등불 아래에서 무언가를 썼다. 그리고 그는 그걸 네 겹으로 접더니 나에게 건넸다.
“생각해 보시고 편지 주세요.”
“알겠습니다. 노광 씨도 건강히 잘 계세요.”
“예. 건강하시고, 편지 꼭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고, 다음날 나는 짐을 챙겨 정들었던 가게를 떠났다. 상사병에 걸린 총각이 무슨 행패를 부릴지 몰라 정들었던 언니들과 인사도 못 나누고 도망치다시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잠시 몸을 피해 집에 가 있는 다고는 하지만 가게로 다시 돌아올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역 앞 시외버스 차부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나면서 그 이가 준 쪽지를 펼쳐 보았다. 화성상회 주소가 적힌 그 이의 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과묵함과 신중함, 큰 키에 듬직한 체격이 떠올랐다. 그만하면 나중에 결혼을 해도 자기 식구를 책임지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잠시 스쳐지나가는 생각일 뿐, 내 가슴 속에 그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은 아직 아니었다.
우리 집은 그동안 형편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내가 서울 통의동 언니네 가게에 갈 당시에는 온 식구가 선화동 단칸방에서 궁색하게 살았는데, 집에 돌아오니 방 두 개짜리 도원동 전세방으로 이사해 있었다. 큰오빠네 부부가 한 방을 쓰고 작은오빠와 어머니가 다른 방을 쓰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인 것은 작은오빠가 사다 놓은 전축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음악 듣는 방법이 디지털화로 MP3까지 다양하고 고급스러워졌지만 당시는 라디오나 전축밖에 없었다. 그런데 허접한 전축이라도 가지고 있는 집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것만 보자면 우리 집은 부잣집이 된 셈이었다.
내가 식구들에게 '상사병 사건'을 간단히 설명하니 어머니와 오빠는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찼다.
“거기 다시 갈 생각하지 마라. 이젠 안 가도 된단다. 어떻게든 살아보자꾸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