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나 (제...

그러던 어느 날 그 이는 군복을 입고 나를 찾아왔다. 한동안 편지가 뜸하더니 해병대에 입대한 것이다. 그때도 통의동 때처럼 별 말 없이 우물쭈물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고, 그 후 한두 번 더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멋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는 또 한참 있다가 편지가 왔다. 파월부대에 지원하여 포항에서 맹훈련을 받고 있는데, 얼마 후면 한국을 떠난다고 했다.

'정순 씨, 사랑합니다.'
편지에 그렇게 씌어 있었는데, 이제 전쟁터로 떠난다니, 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그렇게 과감한 표현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 군대시절의 남편

나는 '사랑' 이라는 단어가 무거웠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깍쟁이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에게 너무 인색하지 않는가 싶어서 이렇게 썼던 것 같다.
'이젠 보고 싶어도 못 보겠네요.'

깍쟁이인 나한테는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었지만, 이역만리 월남으로 떠나는데다가, 돌아올 기약이 없는 사람이니까 아마도 마음 놓고 썼던 것 같다.

편지를 보내고 1주일쯤 지났을 무렵, 아마도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경춘이네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딱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땅만 바라보고 걷는 습관이 있는데, 웬 검정 섀무군화 한 켤레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이였다. 내 편지의 그 한마디에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여 냉큼 달려온 것이었다.

그 이전부터, 그 이가 우리 집에 찾아오면 어머니는 다짜고짜 부지깽이를 들고 호통을 치셨다.
“아니 ,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빨리 가라, 이놈!”

'연애'가 사악시 되던 그 당시에는 '남자' 하면 여자를 가지고 놀다 버리는 존재로 인식돼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 그렇게 구박을 맞으면 그 이는 경춘이네로 향했다. 내가 집이 아니면 거기밖에 갈 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 이는 우리 집에서 문전박대를 받고 경춘이네로 부리나케 오는 길이었다.

"저, 정순 씨!"
"어머, 노광 씨!"
우리는 너무나 갑작스런 만남에 서로 놀라 한동안 말을 못했고, 자유공원으로 데이트를 갔다. 가서는 많이 걷고 사진도 찍고 둘이 막걸리까지 마셨다. 나는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데 그 이의 말에 의하면, 그때 내가 자기보다 막걸리를 더 잘 마셨다고 했다.



	▲ 청용부대 시절, 월남참전에서

경춘이 어머니는 그 이를 참 잘 보았다.
"창례야, 네가 뭐 잘났다고 그렇게 튕기냐? 걔 볼수록 괜찮더라, 남자가 인물도 훤하고 키도 크고."
"어이구, 너보다는 모든 면으로 훨씬 낫다."

결과적으로 보면 경춘이 어머니가 우리한테는 중매쟁이였던 셈이다. 그 은혜를 잊지 않았던 그 이는 나중에 그분에게 가끔씩 용돈도 드리고 무슨 행사가 있을 때면 흡족하게 도와드리곤 하였다.

경춘이는 나보다 일찍 시집을 갔다. 층층시하 외아들에게 시집을 갔고, 갖은 노력 끝에 지금은 용현동에서 한복집을 하면서 손자손녀들과 함께 다복하게 잘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