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에 참전한 후 그 이는 편지를 가끔 보내왔지만, 나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하지만 연애편지라기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소녀가 감상에 빠져 보내는 위문편지 같은 것이었다. 받는 사람의 감정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보내는…….
한 번은 영어사전을 구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하여 부쳐주었다. 일어사전도 부쳐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편지가 왔는데, 전투가 벌어졌는데 자기하고 몇 명만 살아남고 소대원들 거의가 전사했다고 했다. 그 구사일생의 사연은 이랬다.
대대장이 그 이가 착실하니까 평소에도 무슨 일을 믿고 잘 시키곤 했단다. 그때도 그런 일을 맡겼고, 밤을 새우면서 만족스럽게 임무를 완수하자 대대장은 그 이에게 조니워커 양주를 선물로 주었단다.
“수고했다. 이거 병째로 나발 불고 푹 자라.”
술을 마시라는 것도, 마시고 자라는 것도 명령인지라 그 이는 충실하게 복종했단다. 그래서 술에 취해 골아 떨어졌는데 출동명령이 떨어졌고, 그 이는 며칠 밤을 새운 데다가 술로 인사불성이어서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단다.
그런데 그때 나간 소대원들이 전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그 대대장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늘 상 가슴에 안은 채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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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전 당시 망중한을 즐기는 남편(오른쪽)과 전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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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2월 31일에 제대한 그 이는 취직부터 서둘렀다. 그때 시집은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비산리 산 182번지'에 살 때였는데, 출퇴근하기 쉬운 가까운 곳에 삼양펄프라는 회사에 입사하였다. 그이는 워낙 사람이 성실하고 일을 잘하여 회사에서 금세 인정을 받았다.
나한테도 인정을 받은 것이, 나름대로 성실하게 연애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극성이 없어서 편지도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자주 만난 것도 아니었다. 집안 살림이 곤궁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것까지 내가 사정을 봐줄 수는 없었다.
만나서도, 편지에는 쑥스러운 말을 잘도 쓰건만 항상 말이 없었다. 나중 말이지만, 가정형편이 안 좋고 집안에서 반대를 했으니까 할 말이 없어서 그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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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 순에게
그간 소식 없어 걱정이 되어 다시 서신 보냅니다.
지난번 보낸 편지는 받아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시골에 가신 어머님께선 안녕하시며 가내가 별일 없으며 정순 씨 또한 건강히 지내시는지요.
매서운 추위가 지나고 이젠 제법 포근히 풀린 느낌이 듭니다만 아직도 추위가 멀었군요.
저희 어머님께서도 시골에 볼일이 있어서 내려가신지 7일이 되었어요.
지난번 편지에 확실한 날짜를 결정하자고 했는데 여기선 제 생각이나 어머님 생각이나 음력 2.20일에서 3.3일 사이(그러니까 양력으로 3월 16일부터 29일)로 정 하려고 합니다. 이건 확정적이니까 날짜만 정하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원만히 진행되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고 마음에 준비를 하시고 또한 언제 오시며 확실한 일자를 정하는데 어머님께서 시골에서 오시면 상의해서 정하고저 합니다.
당신도 그때 당신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참고가 되어 도움이 되도록 하세요.
당신이 시간이 없더라도 허락을 득하여 16일 오후에 안양집으로 오세요.
그때 정하기로 하겠습니다.
어데 또 화가 나는 데가 있습니까. 편지 답장도 없으니 말입니다.
당신이 화가 나면 난 어떻하나.
같이 화낼 수도 없고 웃어버리고 말아야 겠군.
당신 성당에 열심히 나가세요. 고해성사로 보고 영성체 하세요. 당신이 약해지면 나 또한 약해지는 거나 매한가지니까 말입니다.
이젠 우리도 독신 생활에서 벗어날 날이 서서히 다가오는군요.어덴가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워 질 때가 있어요.
반면 행복한 마음이 앞서는군요.
그러면 당신에 건강과 행운을 빌며 상면 시까지 그리고 답장 기다리며
1.8 노광 보냄.
추신: 이제부터 편지는 집으로 보내겠습니다. |
하지만 한참 감성이 풍부한 소녀에게는 연애를 한다면 달콤한 말이 필요했다. 그런데 달콤한 말은커녕 만나면 먼 거리를 한 바퀴 돌 동안 “그동안 별 일 없었어요?” “안녕히 계세요, 정순 씨”가 거의 전부였다.
남자가 그렇듯 무뚝뚝하고 매력이 없으니 내가 좋아할 일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