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생신이 지난 얼마 후에는 임신을 하였다. 하지만 남편에게만 말하고 시댁에는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안양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날 그만 유산이 되고 말았다. 임신으로 인하여 너무나 행복했는데, 낙심천만이었다. 그러다가 또 임신을 하자 어머니는 그때서야 이러셨다.
“야, 오지 말아라. 밥도 잘 안 먹고 약해 빠져가지고는! 네가 약한데다가 자꾸 차타고 다니니까 유산되나 보다. 이젠 오지 말아라."
그래서 2, 3일마다 안양 가는 일을 멈췄는데, 어머님의 그런 속 깊은 배려 덕분에 첫째 민선이를 뱃속에서 건강하게 기를 수 있었다.
산달이 다가오면서 몸 풀 곳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고민 끝에 시집에 가서 낳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댁에서 낳으면 돈도 절약할 수 있고, 어머님도 좋아하실 것이라는 판단에서 였다.
남편을 창동 집에 혼자 두고 시댁으로 갔다. 간 날 밤부터 진통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막내시동생이 "조카 생긴다!"고 기뻐하면서도 형수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안타까워 출근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어이구, 손자든 손녀든 낳기만 해라.”
어머님도 진통을 겪어내는 네가 안쓰러운지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낮 2시, 우리 예쁜 딸 민선이가 태어났다. 시댁 식구들은 첫 자손을 보았다고 너무너무 좋아했다. 갓난아이답지 않게 새까맣고 길게 자라 있는 머리카락이 신기하여, 어머님한테 혼나면서도 너도나도 다투어 만져보느라 소란스러웠다. 남편도 싱글벙글, 축하인사를 받기에 바빴다. 어머님의 도움으로 3일쯤 누워서 몸조리하였고 2, 3일쯤 더 쉬다가 예쁜 딸을 안고 창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남편은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해산을 하고 돌아와 보니 이미 그쪽으로 옮기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신양제지보다 규모가 월등히 큰 대한펄프였는데, 회사가 의정부에 있어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창동에서 2년 동안의 인연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새삼 놀랐다. 이삿짐을 싣고 집에서 큰길까지 나오려면 한참을 나와야 하는데, 골목에서부터 큰길 대로변까지 사람들이 나와서 내 손을 붙들고 눈물바람을 하였다. 오죽했으면 가게에 있던 손님들이 뛰쳐나와 구경을 할 정도였다. 알뜰부인 새댁이 이사를 간다고…….
의정부 회룡사 올라가는 길목인 호원동 외미에 셋방을 얻었다. 근처에는 양색시들 사는 집이 많았는데, 우리집에도 미군과 같이 사는 데니 엄마네와 주인집까지 세 집이 살았다. 주인집은 살림살이가 넉넉한 집으로, 창동에 비하면 궁궐 같은 한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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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의정부 호원동 셋방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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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펄프로 가면서 월급이 조금 올라, 창동 때보다는 저축을 조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급은 다 갖다드리고 여전히 생활비는 어머님으로부터 타다 썼다.
월급을 타오면 돼지고기 사다가 볶은 것을 술안주 삼아 남편이랑 술잔이라도 기울였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쪼개고 쪼개 봐도 그럴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나도 남편도 서로한테 미안해서, 월급을 받아온 날은 둘 다 말이 없었다.
대한펄프에 와서 얼마 있다가 그동안 식구들이 모은 돈을 모두 합쳐 보니 100만 원쯤 되었다. 그 돈으로 우리는 집을 사는 게 어떻겠냐고 가족 간에 상의를 했다.
남의 집을 전전하는 설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집 갖는 걸 소원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이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두 시동생과 큰시누이는 취직을 하여 돈을 벌고 있지만 아직 막내시누이는 학생이었으니, 여러 가지 궁리가 많았던 것이다
“여보, 온 식구가 집 사는 게 소원인데 그러면 나도 얼마나 좋겠소.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아직 젊고 또 노진(큰시동생)이가 제빵기술이 있으니까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남편은 큰시동생이 제빵 기술이 있으니 나하고 힘을 합쳐 도너츠 가게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오, 이 돈으로 집을 사면 좋겠지만 집에서는 돈이 나오질 않잖아요. 이 돈으로 노진이와 장사를 하게 되면 버리면 집 한 채요, 벌면 집이 몇 채가 될 것이오. 우리는 젊었으니 또 벌면 되잖아요.”
그때 이미 남편은 사업가적인 기질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줌마인 나도 그게 현명한 발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나는 망설여졌다.
결국 남편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고, 어머님한테 말씀을 드리니 좋다고 하셔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남편은 의정부에 조그만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기로 하고, 민선이는 안양 어머님이 키워주기로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