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가끔씩 고오석 사장님이 주시는 금일봉이 큰 도움이 되었다. 병원비는 자꾸 불어만 가는데 아이는 차도가 없이 겨우 유지만 되는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퇴원을 했는데 아이가 금세 다시 심해졌고, 나는 울면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재차 입원을 시켰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마침 다행히도 서울대병원 출신 의사가 부평에서 내과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이를 데리고 2, 3일마다 그곳으로 통원치료를 다녔다. 지선이는 눈이 동그랗고 커서 인형처럼 예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가 삼각형이라, 세균 감염도 방지할 겸해서 큰 목욕 타월을 씌워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놀이터에서 두 애들은 놀고 있고 나는 지선이에게 이유식을 떠먹이는데, 평소에는 숟갈이 가면 입을 벌리던 아이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딸꾹질을 해대는데 눈동자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거였다. 이상한 느낌에, 또 두 애들을 두고 입원시켜야 하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들도 엄마가 우니 따라서 울고,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 생겼을 때만 전화를 하라던 남편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 순간, 남편이 문을 들어서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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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 심곡2동 자택에서 한복으로 한껏 멋을 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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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왜 그러세요?”
“지선이가 이상해요.”
“빨리 입원 시킵시다.”
“아녜요, 안 갈래요. 여보, 이젠 병원 가기 싫어요.”
남편이 아이를 넘겨받아 품에 안았다.
“지선아, 너 왜 그러냐? 조금 있다가 우리, 병원에 가자.”
그랬는데, 잠시 후 남편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가 아빠의 품으로 넘겨지고는 이내 숨을 거둔 것이었다. 1978년 12월 19일이었다.
평소 나는 딸만 낳다 보니 대를 못 잇는 죄스러움에 늘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가는 엄마만 보면 고개가 숙여지고 부러움이 앞섰는데 우리 지선이가 아프면서부터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들이고 딸이고 자기 자식을 낳아서 건강하게 잘 기르는 사람이 하늘에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나는 지선이를 간호하면서 내 목숨만 주지 않았지 모든 걸 다 쏟아주었다. 딸꾹질을 해대고 가래가 차면 목으로 고무호스를 넣어가지고 가래를 빨아댄 적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고, 조금만 숨이 차도 무슨 일이 있을까봐 가슴을 태우며 품안에 안고 밤을 꼬박 지샌 날도 셀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목숨 바쳐 간호를 했건만 그 어린 생명을 못 건지고 보내야 하니, 세상에 내가 엄마로서 얼마나 무능력한지 참으로 한스럽고 너무너무 비통했다. 이사 왔을 때 회사 분들이 긴 괘종시계를 선물로 주었었는데, 버리지 않고 놔두었던 그 포장 박스를 꺼냈다. 다시 이사를 가게 되면 시계 포장하는 데 쓰려고 놔둔 박스가 내 새끼의 싸늘한 주검을 담는데 쓸 줄이야!
아이의 몸을 간단히 묶어 박스에 넣고, 무슨 물건 박스를 포장하듯이 줄로 묶었다. 택시를 불러 포리 묘지로 가야 하니 물건처럼 보여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안 태워줄지도 모른다고 했다. 내가 자꾸 울어대니 남편과 친정어머니는 나를 떼어둔 채 지선이를 안고 택시를 탔다.
지선이는 포리 천주교회 묘지에 묻혔다. '박지선'이라고 새긴 비석도 세워 주었다.
지선이를 내 가슴에 묻고, 나는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한동안 집 바깥을 나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선이가 숨을 거둔 날 남편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고 했다. 그래서 진통제를 여러 알 먹어보았지만 차도가 없고 도저히 못 견디겠기에 집에 왔는데 그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아마도 지선이가 이 세상 나들이를 마치고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아빠를 마지막으로 보고 가려고 부른 것 같았다.
그렇게 신묘한 부녀지간의 애틋한 정으로 맺어진 딸아이를 잃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