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이를 잃은 다음 나는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3개월쯤 되었을 때 또 유산이 되고 말았다. 동네 할머니들의 조언을 받아 용하다는 천수당 한약방을 찾아갔다. 몸이 약하니 보약을 먹고 몸을 잘 추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이는 거 였다.
“약을 잡숫는 것도 좋지만, 아예 아들 갖는 방법을 써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게 있어요?”
“그럼요.”
그렇게 해서 아들 낳는 방법을 알아왔다. 한의사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나는 고기는 입 에도 안 대고 채식만 하였고, 애 아빠는 육식만 하라고 해서 주로 닭볶음을 해서 먹였다. 소고기·돼지고기를 먹이고 싶었지만 애들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가 쪼들릴 때였다.
그랬는데도 내내 아기가 들어서지 않다가 6개월이 되어 드디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여보, 우리 팔자에는 딸밖에 없으니까 아예 기대도 하지 말아요.”
나는 미리부터 남편에게 못을 박았다. 아들이면 좋고, 딸이더라도 건강하게 잘 키우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아이를 가지고 난 뒤부터, 나는 모든 일에 넉넉하게 마음을 가졌다. 시장에 가서도 물건 값을 깎지도 더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살아가는 일도 아등바등 발을 동동 구르며 살지 않기로 하였다.
큰 시동생이 빌려갔던 돈을 가져와 부천시 심곡2동에 집을 샀다. 시동생이 하려고 했던 종로 하루방이 마침 화재가 나서 도로 가져온 돈에 고오석 사장님이 보태주신 돈을 보태어 마련한 52평 단독주택이었다.
임신 9개월쯤 되어서 새 집으로 이사를 갔다. 집안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마자 나는 너무나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천역 앞에 있는 한의사를 찾아갔다. 맥을 잘 짚기로 소문난 분이었는데, 물론 애 아빠한테는 비밀이었다.
“선생님, 제가 아들만 둘이어서 이번엔 딸이었음 좋겠는데요.”
그렇게 꾀를 내어 말씀을 드렸는데 선생님은 맥을 짚어보고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또 딸인가 보다 싶어 낙심천만하고 있는데 순간 이러는 것이었다.
“어쩌죠, 이번에도 아들이신데?”
“어머, 그래요. 이걸 이쩌지!”
아들이라니! 이번엔 아들이라니! 내 뱃속에 딸만 있는 게 아니라 아들도 들어 있었다니……. 어머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그때의 기쁜 마음이야 이루 형용할 수 없었지만, 만에 하나 아닐지도 모르니 남편한테는 차마 말을 못하고, 그날을 맞았다.
1980년 2월 29일, 엄마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니까 두 딸도 같이 울고 있는 가운데 오전 11시쯤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만 낳으면 정신을 잃던 내가 그날따라 정신을 잃지 않고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기다리는데 아무 소리를 안 하시는 거였다.
‘어이쿠, 또 딸이구나?’
이렇게 실망하고 있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야 야, 꼬추다.”
꼬추! 꼬추! 하면서 난 정신을 놓았는데, 잠시 후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유치원생인 큰딸이 전화를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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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 세용이를 낳고(19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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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가 박노광 공장장님 이시거든요. 좀 바꿔주시겠어요? 아빠, 아빠가 그렇게 그리던 아들을 낳았어요. 축하드려요!”
민선이의 말에 남편은 기분이 어땠을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이 났다. 백일 때 온 회사 동료의 말에 의하면, 남편이 전화를 받으며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고 했다.
구로동에 가서 손수 아들아이 이름을 지어 왔다. 인간 세 자, 얼굴용 자, 박세용. 나는 딸을 잃고 너무나 기가 막히고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서 성당에 1년쯤 냉담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들을 낳고는 '하느님이 이렇게 깊은 뜻이 계셨구나' 하며 깊은 반성을 하고 다시 잘 나가게 되었다. 아들은 이근창 신부님한테 유아영세를 받았고, 나는 만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업고 다니면서 봉사를 시작했다.
어머님에게 아들을 낳았다는 전화를 한 것도 민선이였다. 어머님은 그 즉시로 달려오시어 "야, 나도 손자 볼 때가 다 있구나. 자, 악수하자."며 손을 내미셨고 나도 손을 마주 잡았다.
어머님은 연신 손자를 쳐다보시며 기뻐 어쩔 줄을 모르셨다. 하느님께서 나의 원망을 탓하지 않으시고 아들을 크나큰 선물로 주셨고, 나는 감사하는 보답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아들을 업고 다니며 육신의 힘이 필요한 곳에는 힘을, 물질이 필요한 곳에는 재정 지원을 힘닿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