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에게 끌려갈 뻔한 일 (제3...

그 시절에 또 하나 생각나는 무서웠던 사건은 내가 문둥이에게 납치당할 뻔했던 일이다. 12살 어렸을 때 나는 참 몸집도 작은 데다 야윈 편이었다. 먹는 게 시원찮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도 나는 그 콩꼬투리만한 여린 몸으로 물지게 지어 나르고, 땔감 준비하고, 장사하고, 조개잡이까지 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억척빼기였다. 그렇게 고달픈 나날을 살면서도 밤으로는 동네 아이들과 모여 술래잡기 같은 놀이를 하며 또 신나게 놀곤 하였다.

어느 여름날 밤, 그렇게 놀고 있는데 한 낯선 남자가 우리들에게 다가오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야, 너희들 내가 극장 구경 시켜줄까?”
“와! 좋아요!”

텔레비전은 언감생심 있지도 않을 때이고, 라디오조차 귀했던 그 당시에 거의 유일한 오락이 극장(영화) 구경이었다. 하지만 가난한집 애들에게 입장료가 있을 리 없었으니 그저 꿈만 꿀 뿐이었는데, '공짜 구경을 시켜준다'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하고 그 사람 곁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남자는 우리를 가만히 훑어보더니 나를 딱 가리켰다.

“야, 너희들 다 데리고 우르르 가면 곤란해. 그래서 얘한테 극장표 사줘서 보낼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라. 금세 갔다 올 테니까……. 자, 가자”

처음 보는 사람이 그 캄캄한 밤에, 아무 잇속 없이 공짜 구경을 시켜준다는 말을 믿고 따라나선 것은 내가 어리기도 했지만 ‘극장 구경’ 이라는 말에 왈칵 현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를 따라 얼마쯤 가니 갈림길이 나왔는데, 발걸음을 극장 쪽이 아니라 산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이쪽이 아니잖아요!”
“너 아직 모르는구나. 이쪽이 지름길이야.”
“아닌데…….”

아이들하고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으니 내가 길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내가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으니 나를 번쩍 안아들어 어깨에다 둘러맸다.

“너, 가만히 있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나는 왈칵 겁이 나서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얹혀서 끌려갔다. 사위가 온통 컴컴한 데다 인가조차 없으니 비명을 질러도 도움은 커녕 꼼짝 못하고 당할 판이었다.

남자는 동네 근처의 모모산으로 접어들자 힘이 드는지 호흡이 거칠어졌고, 얼마쯤 올라가 비탈진 곳 풀밭에 나를 내동댕이쳤다. 저만치 불 꺼진 교회 하나가 뿌옇게 보일 뿐 주위에 인가라고는 한 점 불빛조차 없는 야산이었다. 아무리 소리를 쳐도 구해줄 사람도 없을 것이니 '나는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남자는 내 가슴을 한 발로 콱 밟아 눌렀다.
“가만히 있어! 여기서 좀 더 가야 하니까.”

그러면서 자기 주머니를 뒤지는데, 아마도 나를 메고 가는 게 힘이드니 끈 같은 것으로 나를 묶어 끌고 가려는 것 같았다. 윗옷을 뒤진 다음 한쪽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찾는 것이 없는지 나를 밟고 있는 쪽 바지 주머니를 뒤지려고 내 가슴을 누르고 있던 발을 땅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아래로 몸을 굴렸다. 몸을 일으켜서 뜀박질할 여유조차 없는 일촉즉발의 순간인 만큼 구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니, 요년이! 거기 안 서!”

다행히도 경사가 좀 심한 비탈길이어서 나는 순식간에 몇 십 미터를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다. 바위에 부딪히고 나무에 긁히고 얕은 절벽 같은 곳에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뿐이어서 아픈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나무에 어깨를 심하게 부딪치며 구르기를 멈추었다. 어깨 쪽에 욱신 통증이 왔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년이 어딨어! 야, 어딨냐? 빨리 나와!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야! 너, 나 따라가면 호강하면서 살 수 있단 말이야!”

내가 멈춘 곳에는 키 큰 풀들이 무성해서 숨기에는 그만이었다.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짙은 어둠이 이제는 문둥이의 마수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뭇가지를 몽둥이 삼아 수풀을 헤치고 다니더니 이내 멈춰 서서 가만히 있었다.

눈으로 찾을 수 없으니 인기척을 듣고 나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거친 숨소리를 막기 위해 얼른 옷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하지만 심장 뛰는 소리가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그 소리 때문에 들킬 것 같아 바짝 긴장한 채 웅크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남자는 한참을 더 찾다가 찾는 것을 단념했는지 투덜거리며 산 정상 쪽으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나는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더 기다렸다가 살며시 몸을 일으킨 다음 냅다 산 아래쪽을 향해 뛰었다.

신발이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맨발이었지만 '다리야 나 살려라' 하고 죽도록 뛰어 동네에 와보니 아이들은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문둥병 환자가 많았고, 문둥병에 대한 속설이 많아서 하마터면 어린 나이에 어딘가로 끌려가 속설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가슴 떨리는 사건이었다.